사람을 만나면 눈보다 귀가 힘들다. 수업할 때도 마찬가지. 화는 눈에서 출발해도 결국 귀에서 터진다. 내 귀는 부실하다. 참을성이 없고 예민하다. 가장 공들여서 씻는 곳은 오늘도 수고한 내 귀다. 거품으로 꼼꼼히 문지르고 헹궜다.
참을 수 없는 소리가 있다. 속이 드러나는 자랑 아닌 자랑이 그 하나다. 자랑을 자랑답게 하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우리 집에 금덩이가 많아요.”는 괜찮은데 “금덩이를 어디 넣어 놔야 안전한지 모르겠어요.”는 참기 힘들다. “남편이 요리를 잘해요.”는 괜찮은데 “남편이 한 음식을 이제는 못 먹겠어요.”는 화가 난다. “우리 애는 공부를 잘해요.”는 괜찮은데 “애가 밤을 새워서 공부하니 내가 힘들어요.”는 짜증 난다. 부정적 감정을 덧칠하여 재차 강조하는 자랑은 귀를 막고 싶다. 거북한 덧칠이 덕지덕지 붙은 소리는 참기 힘들다. 언젠가 용기 있는 사람이 된다면 나는 귀를 막을지도 모른다. ‘그냥 자랑을 자랑같이 하세요. 그건 들어 줄게요. 호모 사피엔스로서 서로 기분 좋을 만큼 부러워하거나 축하해 줄 수 있어요.’ 귀를 막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나는 그 망할 덧칠 자랑에 적절한 답을 만들며 견딘다. ‘금덩이를 대문 앞에 두세요. 금덩이 보러 사람들이 구경 올 거예요.’ 라던가 ‘남편 보는 데서 음식을 버리세요. 남편이 다시는 요리를 해주지 않을 거예요.’, ‘공부 그만하라고 애를 때리세요. 애들은 맞으면서 크는 거잖아요.’ 더 늙으면 입 밖으로 터져 나올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분들보다 젊어서 다행이다.
비난의 옷을 입은 부러워하는 소리도 참기 힘들다. 차라리 뒷담화가 낫다. 뒷담화는 적어도 뒷담화의 주인공이 없을 때 하니 예의가 있다. 뒷담화는 맨살이라 안쓰럽기도 하다. 비난의 칼을 숨긴 부러워함은 비열하다. “골프 여행 다녀왔다고요? 좋았겠다. 그 나라 여행 가면 총 맞는다던데...”, “그 아파트를 정말 샀어요? 얼마 전에 그 아파트 사고 났었잖아.”, “선생님, 요즘 너무 열심히 하더라. 애들이 얼마나 알아준다고.” 이런 소리가 들리면 내 귀는 힘들다. 괄약근 조이듯 아무도 모르게 귀가 덮어졌으면 좋겠다. 마찬가지로 ‘골프 여행 한 번도 못 가보셨나 봐요,’ ‘주택담보대출 이자 내느라 힘드시죠.’ ‘선생님반 애들이 요즘 말을 안 듣나 봐요.’라고 반격의 반응을 상상하는 수밖에.
최악은 두 가지 소리의 대화이다. A가 속이 드러나는 자랑 아닌 자랑을 하면 B는 비난의 옷을 입은 부러움으로 반응하는 경우다. 오늘도 어쩔 수 없는 자리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내가 귀를 막아도 이상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도 이상한 자리. 요즘 이어폰은 귀에 쏙 들어가던데 더 깊숙하게 들어가 밖에서 아예 안 보이는 이어폰이 개발되었으면 좋겠다.
교실에서도 힘든 소리가 있다. 쉬는 시간 울리는 핸드폰 소리는 괜찮은데 수업시간 울리는 핸드폰 소리는 화가 난다. 수업시간 몰래 보는 만화책 넘기는 소리는 괜찮은데 학습지를 하다가 구겨버리는 소리는 참기 힘들다. “선생님 모르겠어요.”는 괜찮은데 “선생님, 하기 싫어요.”는 견디기 힘들다. 나는 무표정하게 “그러면 하지 마세요. 그만 하세요.”라고 말하면 기분 나쁜 표정보다 비꼬는 한숨 소리나 콧방귀 소리가 괴롭다. 안 해도 되니 좋다고 웃는 소리나 즉시 친구와 떠드는 소리는 화가 난다. 어린이의 모습은 눈을 잠시 감으면 해결되지만 내 귀는 견디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같은 소리도 극과 극으로 다르다. 발표하려고 의자를 빼는 소리는 사랑스러운데 습관적으로 의자를 뺐다 넣었다 하는 반복적 소리는 화가 난다. 이럴 경우 그만하라는 지적도 무용하다. 습관은 지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불필요하게 화난 어린이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다지 화날 상황이 아니다. 들어보면 화난 아이도 잘못이 있다. 화가 나서 고조된 목소리, 씩씩대는 숨소리, 그러다 울어버리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잠시 월급을 생각한다. ‘오늘도 소리를 견디는 대가를 벌고 있다.’고.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소리도 있다. 러닝머신에서 피곤한 심장을 겨우 견디며 달리고 있는데 옆 사람이 내가 뛰는 발소리와 완벽히 겹치며 달리는 소리는 견디기 힘들다. 나는 일부러 옆 사람과 어긋나도록 뛰어 보지만 쉽지 않다. 어긋나다가 겹쳐지면 귀가 괴롭고 심장은 더 피곤해진다. ‘저랑 똑같이 뛰지 마세요.’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러닝머신에 매달린 티브이에 의지해 보지만 내 귀는 부실하다. 그냥 참는 수밖에 없다. 나는 잘 놀라는 편인데 특히 소리로 놀랄 때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부르는 소리, 운동하는 아저씨가 갑자기 아령을 세게 내려놓는 소리,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커지는 사람 목소리는 폭력적이다. 화가 날 새도 없다. 마음의 준비를 하거나 견딜 여유도 없다. 내 귀는 꼼짝없이 당한다.
최근 물어뜯는 국회의원의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걸러지지 않은 비난으로 편 갈라 싸우는 목소리,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한 자극적인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티브이나 라디오는 잠시 줄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정치는 빨강과 파랑으로 나뉘어 흉기가 된 소리만 오고 갈 뿐이다.
요즘도 가끔 이명이 온다. 한쪽에서 웅-하는 낮고 무거운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양쪽에서 삐-하는 얇고 높은 소리가 들릴 때도 있다. 이명은 귀가 지쳤을 때 내는 몸부림이다. 내가 내는 소리도 다른 이의 귀를 힘들게 했을까 반성하다가도 예민한 내 귀가 원망스럽다. 최근 유튜브에 많이 올라오는 ASMR도 현대인의 귓병 때문이 아닐까. 사실 현대인만의 문제도 아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엠시스퀘어’라고 집중력을 높이는 소리가 나오는 기계도 있었으니. 소리가 주는 스트레스가 크다면 반대로 소리로 인한 만족감 또한 다른 감각보다 예민하다는 뜻이니 내일은 더 크게 듣고 싶은 소리를 찾아봐야겠다. 소리를 견디기만 하는 일은 아무래도 좀 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