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짧아서 꿰매는 중

by 물지우개

내 미싱 초기작 커튼을 뜯고 있다. 처음으로 샀던 원단이다. 혼자서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어갈 즈음 만든 커튼이다. 이 커튼의 탄생 비화는 실로 거룩하다. 디자인 스케치까지 했으니. 조그맣던 그 방(한산도 사택)에 책상도 없이 엎드린 나는 연습장에 직사각형을 그리고 색연필로 칠하며 원단을 상상했다. 의자를 딛고 올라서서 귀에 연필을 꽂고는(난 이 행동을 꼭 해보고 싶었다) 줄자로 창틀 사이즈를 쟀다. 가로 세로 길이에 시접까지 더한 최종 숫자를 직사각형에 꼼꼼히 기록했다. 여러 종류의 원단을 커튼에 어떻게 섞으면 좋을지 몰라 여러 개의 직사각형을 그려 여러 가지 경우로 디자인했다. 원단이 도착하자 나는 방바닥에 활짝 펼쳤고, 토끼 걸음으로 자르는 선을 그었다. 가위가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원단을 자를 때는 음악이 필요 없었다. 비 오는 날 새 우산을 쓰고 걷는 걸음처럼 가위가 걷는 소리는 투명했다.



오버록이 없어도 문제없었다. 그땐 오버록이 필요 없을 만큼 못할 때였으니까. 미싱과 논다는 설렘, 혼자 작품을 만든다는 흥분으로도 흡족할 때였으니까. 우둘투둘한 올 풀림도 다림질로 꼼꼼히 다려서 말아 넣었다. 그 커튼의 실밥을 뜯는 지금 그때 말아 넣은 천을 끄집어내느라 나는 뒷목이 당긴다. 그땐 커튼의 모서리를 박으면서 ‘아무래도 천부적이야.’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나는 재봉을 한 게 아니라 우격다짐으로 천에 못질을 해 놨다. 말도 안 되는 억지 직각 모서리다. 재봉이 잘 된 작품은 바늘땀이 골라 뜯기도 편한데 이건 도대체 어디다 칼을 갖다 대야 하는 건지 답이 안 나온다. 뜯는 데에만 시간이 꽤 걸리겠다. 아무래도 오늘은 해체만 하다 시간이 다 갈 것 같다.


커튼을 해체하며 그 시절 감정을 복기한다. 공방 사람들과 미싱을 처음 만난 날, 무장해제되던 내 감정. 봇물 터지던 내 이야기와 수다, 샘솟던 식욕까지 나는 계산이 없었다. 계산할 수 없었다.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던 흥분으로 휴직의 판타지를 실현하고 싶었다. 그 출발에 이 커튼이 있었다. 남은 원단이 아까워 이었더니 디자인에 없던 주머니가 바로 만들어졌다(원단 가를 의도보다 더 둘둘 말아 넣어 어차피 디자인한 치수는 의미 없어진 지 오래). 생각하는 대로 뭐든 만들 수 있는 마법사가 된 듯 그땐 어찌나 신기하고 재미있던지. 지금은? 제대로 잇는 방법을 몰라 엉터리로 붙인 그 주머니를 뜯다가 화가 날 지경이다. ‘뭐 이따위로 붙였어? 커튼에 주머니가 어울리기나 해?’


미싱으로 하는 바느질도 예술이다. 글, 그림, 음악, 사진 등 예술이 그러하듯 미싱을 하는 중에도 그때의 이성과 감성이 투입된다. 작품을 만든 사람 그 자체다. 기계와 재료가 같아도 사람이 다르면 작품이 다르다. 기계가 하는 바느질이지만 희한하게도 가위질에, 바늘땀에, 시접에, 주름에, 단춧구멍에 그 사람이 있다. 바느질을 하는 사람이 작품 곳곳에 깃든다. 작품을 감상하듯 완성품을 가만히 만지면 만든 사람의 살결이 느껴진다. 가슴에 대면 향기가 난다. 손에 들면 그 사람이 내 손을 잡고, 입으면 그 사람의 영혼이 겹쳐진다. 글과 그림은 눈으로 들어오고 음악이 귀로 들어온다면 바느질은 피부로 들어온다.


예술가 자신의 작품 감상이 이성과 감정을 복기하는 행위이듯 바느질도 마찬가지다. 특히 칼을 들고 내가 만든 작품의 바늘땀을 뜯으면 분해된 이성과 감정이 고스란히 실밥으로 쏟아진다. 원단을 고를 때 설렘, 완성을 향한 그리움, 피부와 닿을 때 느낄 보드라움, 어울릴지 요리조리 재 보던 재미가 투두둑 뜯어진다.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창작의 고통은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으니 복기가 즐거울 리가. 또 다른 자아를 만나는 일이 두렵다. 종잡을 수 없는 날씨 같은 자신을 만나는 일은 민망하고 새삼스럽다. 낯설다면 더할지도. 세탁해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빛바랜 이성과 감성이 정말 내 것이 맞나 싶다.


커튼이 분해되어 천 조각이 되었다. 아이보리색 20수 면, 유채꽃무늬 아사면이 풀어진 머리카락처럼 흩어져 있다. 뜨거운 물에 세제를 부어 휘휘 젓고 천을 담근다. 물기를 머금은 옷감은 새로 태어날 꿈을 꾼다. 재봉으로 구멍 났던 생채기가 아물기를 기다린다. 올이 풀려 줄어들어도 괜찮다. 제 살이 깎여도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줄어든 모습도 신선하다. 올이 풀려도 사실 그리 많이 줄지 않는다. 어차피 너덜거리는 번뇌는 영원하지 않다. 잘려나가야 마땅한 올을 위해 오버록이라는 기계도 존재하니. 바람에 옷감을 널어 말린다. 바늘이 냈던 생채기는 아물어 가고 쌓인 먼지 같던 기억이 날아가는 순간이다. 옷감은 건조되고 생각은 재탄생한다.



짧았던 생각을 다시 꿰맨다. 꿰매고 나면 시접을 모아 오버록을 친다. 쓸데없던 번뇌는 가루가 되어 오버록 아래 수북하게 쌓인다. 꿰맨 천에 다시 생각을 그린다. 가방을 만들어 볼까. 앞치마가 좋을까. 좀 더 과감하게 블라우스를 그려볼까. 옷감에 그림을 그리며 생각을 재단한다. 재단은 바느질만큼 중요한 과정이다. 시접을 두지 않으면 복기의 고통을 중간에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짧은 생각이라도 여유가 필요하다. 생각이 단단하다면 0.5cm로도 가능하지만 내 허약한 생각은 1cm는 있어야 한다. 더 많은 시접은 걸리적거린다. 생각의 여유는 딱 그 정도가 좋다.


미싱의 바늘 끝에 내 눈을 집중한다. 내가 스며드는 중요한 순간이니. 페달을 세게 밟는다면 자신감과 성급함이 깃들고, 약하게 밟는다면 신중함과 소심함이 꿰매 진다. 윤회 중인 커튼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과거의 아픈 기억을 잊는 중일까. 아파서 아름다웠노라 추억할까. 전생의 생채기에 다시 바늘을 꽂게 될까 봐 나는 페달을 세게 밟을 수 없다. 그려놓은 완성선을 따라 한 걸음씩 외롭게 걸어간다. 외로워도 의롭다. 옷감 위를 묵묵히 걷는 바늘은 원래 혼자이기 때문이다. 외로운 생각이 의롭게 걸어가는 모습은 꿰매는 이를 좋은 사람으로 만든다.


생각을 꿰매다가 뜯고 다시 꿰매며 좀 더 좋은 내가 되는 꿈을 꾼다.


어느새 커튼은 블라우스가 되었다.

이제 블라우스는 실밥이 뜯어지는 꿈을 꾸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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