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정신을 잇는 차례 상차림에 대해

by 물지우개

‘4·19 정신을 이어받아’,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이어받아’, ‘독립투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촛불의 정신을 이어받아’ 같이 정신을 이어받는 행위는 신을 향한 믿음에 가깝다. 그 행위의 타당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불온하고 이적(異跡) 행동이다. 정의로웠던 앞선 사람의 정신을 따르자는 말이니, ‘정의롭다’와 ‘따르다’는 이 문장의 핵심이다. 정의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다고 해도 ‘따르다’가 혹시 ‘답습’이라면 정신을 이어받는 행위일까? 추석 차례를 보며 잠시 생각해보았다.




장남 하고는 절대 결혼하면 안 된다는 엄마의 말은 어린 내 머릿속에도 새겨졌다. 맏며느리만의 책임감과 시집살이에 대한 한은 엄마의 뼈마디 사이사이에서 연골을 갉아먹었다. 연골 파괴자의 주범 중에 주범은 바로 상 차리기였다. 전날 아침부터 준비하는 기제사 상 차리기는 당일 자정이 지나야 시작했고 새벽 2시가 넘어야 끝났다. 설날에는 동트기 전 떡국 상부터 아침 차례 상에 이어 셀 수없는 손님상까지였다. 추석도 마찬가지. 첩첩산중에 집성촌의 대가족제도에서 엄마는 피도 섞이지 않은 조상들의 정신을 이어받는데 노동을 헌신했다. 아니, 노동을 갈취당했다.

시어머님도 마찬가지. 조상들보다 내 가족, 내 새끼들 잘 먹이고 싶어서 상을 차린다고 하시지만 구색을 갖추기 위해 여러 번 장을 보고 요리에 공들인다. 이제는 연세도 많으신 탓에 상 차리는데 필요한 재료나 과정을 자주 깜빡해서 손발이 더 힘들다(시아버님은 시어머님이 요 며칠 주무실 때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고 증언하셨다). 제사나 차례 말미에 상 앞에서 누구보다 간절한 절을 하시는 분도 시어머님이다. 어쩌면 그 순간을 위해 돈과 시간과 노동을 기꺼이 납헌했을지도 모른다. 정신을 이어받는 중이니까.

정신을 이어받는데 엄마처럼 강요된 행위뿐이라면, 시어머니처럼 가족을 먹이기 위하거나 조상께 복을 빌기 위해서라면, 정신을 이어받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엄마나 시어머니가 전통을 계승하지도 않을뿐더러 조상의 정신과도 아무 상관없다고 말하고 싶다. 엄마나 시어머님이 하는 상 차리기는 답습에 기인한 세뇌당한 행위일 뿐이다. 강요나 습관으로 계속 따르다 보니 사리분별력 없이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을 뿐이다. 강요로 공부를 하다 보니 왜 공부해야 하는지, 공부를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공부 방법과 과정이 능숙해도 주체적으로 결정하지 않아 시킨 대로만 하고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오랜 시간 답습에 의한 세뇌는 생각과 판단을 파괴시키고, 후손에게마저 답습을 강요한다. 어쩌면 정신을 이어온 게 아니라 피해를 대물림하는 행위일지 모른다.

정신을 이어받는다고 말하기 전에 신중할 수는 없을까. 그 정신이 무엇인지, 그 정신의 시대적 공간적 배경은 무엇인지, 특수한 배경에서만 정의로운 것은 아닌지, 시대와 공간이 바뀌어도 그 정의는 계속될 만한지, 이어받아야 하는 목적은 무엇인지, 이어받는 행위가 현재에 타당한지, 그 행위를 그대로 따라 해야 하는지, 변형해야 하는지, 어떤 방법이 정신을 이어받는데 더 적절한지, 답습이 아니라 계승을 위한 최적은 방법은 무엇인지, 그 방법이 구성원 대다수의 동의를 얻을 만한지, 행위 이후 점검해봤을 때 정신을 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등 세분화하여 논의해보면 어떨까.

비단 상 차리기뿐만 아니라 정신을 이어받는 여러 의식, 행사가 우리 주변에 많다. 과거에 비해 횟수나 규모가 많이 줄었지만 학교에서 계기교육은 여전히 고루하다. 삼일절, 광복절, 6·25, 개천절, 한글날 등 정신의 타당성을 넘어선 교육 행위는 반드시 해야만 하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 행위는 내가 어릴 때 들었던 교육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어받을 정신에 대해 아이들과 충분히 논의할 시간도 없을뿐더러 교육의 결과물만 재촉하는 까닭에 나는 단언컨대 현재의 계기교육이 아이들에게 결코 그 정신을 이어주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6학년 학생도 삼일절, 광복절은 알아도 개천절이나 제헌절은 모른다. 예를 들어 한글날, 광복절에 하는 계기교육은 아이들에게 한글의 우수성을 강요하거나 일본을 향한 근거 없는 분노를 낳을 뿐이다. 한글 창제나 독립운동에 대해 그 정신을 아이들에게 물으면 쉽게 답하지 못한다. 단순히 교육 방법만을 문제일까?

이번 추석 차례 상을 보며 별 도움 안 되는 막내며느리인 내가 건방지게 상 차리기에 대해 딴죽을 걸었다. 돈과 시간, 노동을 낭비하고 정신을 잇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이 ‘상’의 폐지를 주장하는 내 말에 시어머님은 동의하면서도 나쁜 짓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그 정신을 며느리에게 바르게 이어 주기 위해서라도 상 차리는 행위는 없어져야 한다는 내 말에 움찔하면서도 가족이 건강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는 핑계를 댔다. 지금의 영양 과잉 시대에 건강한 음식이란 결코 굽고 튀기는 상차림 음식이 아니라고 내 말을 듣고서야 억지 동의를 하셨다. 오랜 시간 이어진 세뇌 때문이다. 세뇌의 왕은 바로 우리 아버지다. 아직도 자정에 두루마기를 입고 탕건을 쓴다. 고향 땅을 향하도록 나침반으로 상 확인하고 우렁차게 제문을 읽는다. 시가는 먹혀도 친정에는 내 딴죽이 먹힐 리가 없다. 출가외인은 빠지라고 호통을 하실지도. 아버지는 강씨 집안 조상의 기릴 만한 정신을 알고 있을까? 흠이 되는 역사는 없었을까? 객관적으로 조상의 정신을 판단했을까? 그 정신은 아버지에게 얼마나 이어졌을까? 오빠나 나한테 그 정신을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하실까? 연골 닳는 엄마의 노동이 그 목적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버지 또한 세뇌당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의미도 목적도 판단도 없는 고루한 답습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후세가 성인이라 판단하는 유명 종갓집의 차례상을 뉴스에서 보았다. 퇴계 이황, 명재 윤증 종가의 차례 상은 놀랍도록 간소했고 검소했다. 그 사람들이 말하는 추석 차례의 의미는 밥을 먹기 전에 어른이 먼저 숟가락을 들 때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햇과일과 햇곡식을 먹기 전에 조상께 먼저 보인다는 뜻이 전부였다. 지역과 집안에 따라 재료와 조리법이 다르니 어동육서, 두동미서, 홍동백서, 조율이시 등과 같은 법칙은 있을 수 없고 사당의 상은 워낙 작아서 음식을 많이 올릴 수도 없다. 조선 후기 율곡 이이도 차례의 간소화를 주장하면서 최소한의 예만 표하면 충분하다고 했다. 어쩌면 지금까지 이어져온 상다리 부러지는 갖가지 음식은 조상의 그 정신이 하도 부실해서 음식으로 덮고자 하는 허례가 아닐까. 진짜 부자는 타인을 위해 말없이 재물을 베풀고, 성인은 사람 많은 곳에서 말없이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것처럼. 조상이 훌륭할수록 조상의 정신을 기리는 제사상과 차례상은 검소한 것이 맞다. 음식으로 과시할 필요가 없다.




또 생각해보면 정신을 잇는다는 말도 어떤 행위만으로도 이뤄질 수 있을까. 지식처럼 배울 수는 있겠지만 그 정신이 온전히 내 것이 된다는 것이 가능할까. 내 부모, 내 자식의 속도 알 수 없고 내 마음도 알 수 없는 복잡하고 입체적인 인간의 정신을 어떻게 잇는다는 말인지. 정신의 훌륭한 부분만 추출해 닮아가는 일이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그 사람의 이런 행적이 훌륭했다’ 혹은 ‘그 일의 이 점이 정의로웠다’라는 가치판단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말은 부풀어진 과대 표현이 아닐까.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인간의 능력 이상의 말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명절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존재하리라는 예감. 명절의 의미, 차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면 오로지 하나, 오랜만에 가족이 모인다는 사실이다. 가족을 만들기도 어려운 현대 사회에 명절은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 잃어버린, 잊어버린 관계를 회복하는 시간이다. 가족을 있게 한 조상께 간단한 상차림으로 인사만 하고, 모두가 즐겁게 명절을 보낼 수 있는 우리 집 만의 방법을 생각하면 좋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