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해서 다행이다

by 물지우개

출근길, 나는 다시 우울해진다.


힘겹게 돋아나던 존재감이 짓밟히는 느낌이다. 오늘도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리면 어쩌나 그리하여 민원이 들어오고 나는 또 잠시 지옥을 체험하면 어쩌나 학교로 향하는 운전대를 확 돌리고 싶다. 머릿속으로 몇 번의 외도를 상상하고는 나는 아무렇지 않게 교실로 들어간다. 얘들아 안녕! 차마 환하게 웃을 수는 없다.


또 내가 나를 찌를까 봐 나는 말과 행동에 최선을 다했다. 화내고 싶었지만 웃으며 넘어갔고 잔소리가 튀어나올 뻔했지만 기특하게 꿀꺽 넘겼다. 출근길의 자책이 제법 도움이 된 셈이다. 적어도 아침보다 우울하지는 않지만 안도하는 내 모습이 참 안됐다. 우울이 민원을 예방하고 불안을 묻은 현실에 다시 슬퍼지는 꼴이라니.


나는 이 업이 편하고 누구보다 감사하지만 내가 걸어온 만큼 더 걸어가야 한다 생각하면 벌써부터 숨이 막힌다. 아무리 떠올려봐도 이보다 평탄하고 고운 길이 없어 나는 다른 길을 생각할 수 없다. 보란 듯이 벗어던지고 뛰쳐나갈 용기는 충분하지만, 손가락질과 궁핍함을 견딜 자신이 없다. 나는 오늘도 건강하게 우울해하며 무사히 지나가길 기도하며 견딜 뿐이다.


그래, 좋다. 나에게 다시 태어날 기회를 준다면? 사람 아닌 것과 사람처럼 소통하며 깊게 연결된 삶을 살고 싶다(나는 자연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살을 깎는 창작의 고통을 겪는 화가나 살인적인 연습량에 매몰되는 연주가가 되고 싶다.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예술이 아니라 마음 가는 대로 그리거나 연주하고 내 예술에 미쳐서 만족하는 괴짜가 되고 싶다. 가난해도 누추하지 않고 비난에도 숙이지 않고 내 잘난 맛에 행복한 사람이면 좋겠다. 가끔은 내 재능을 좋아하는 소수의 사람을 만나 차를 마시고 사는 얘기를 하며 수줍게 작품을 나누고 싶다. 사람 아닌 것과 사람처럼 소통하기에 사람이 그립지 않고, 사람이 아니기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사랑할 수 있다. 사람 아닌 것과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림으로, 음악으로 다양한 사람이 사는 다양한 장면을 표현하고 싶다.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자식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부모형제와 연락하지 않겠다. 사람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퇴근길, 나는 다시 우울해진다.

우울해서 다행이다. 덕분에 오늘도 아무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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