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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지우개 Jul 31. 2024

박웅현 [책은 도끼다]

겁이 많던 여자아이는 엄마 손을 놓는 것이 가장 무서웠습니다. 엄마가 물건을 사려고 손을 놓고 흥정을 하면 아이는 엄마의 옷자락을 꼭 쥐었어요. 엄마가 양손에 물건을 들어 옷자락을 잡기도 불편해지면 아이는 엄마의 엉덩이에 시선을 놓칠세라 집중하며 걸었습니다. 아이는 그렇게 엄마가 걸어간 을 따라 걸었습니다. 그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에 다녀온 어느 날 아이는 바로 알아챘습니다. 엄마가 집을 나갔습니다. 전날 아빠와 심하게 다툰 엄마는 결국 나가버렸습니다. 옷장을 여니 엄마 옷이 조금 없어졌습니다. 아이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엄마가 나를 버렸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살아갈 이 막막한 아이는 엄마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퇴근한 아빠는 표정이 굳었습니다. 아이에게는 아무 말 없이 여기저기 전화를 했습니다. 한숨을 쉬고 담배를 피우고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아이에게 밥 먹었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아이도 아빠에게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방에 들어가 그림을 그리거나 인형만 만지작거렸습니다. 오늘도 쉬는 시간에 같이 떠들었던 친구들은 다 행복해 보이는데 행복, 그게 내게는 참 어려운 것이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났습니다. 어쩌면 엄마는 엄마의 행복을 찾아서 먼 을 떠났다고 생각하니 더 눈물이 났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엄마가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엄마는 아이를 슬픈 눈으로 쳐다보며

 “네가 눈에 밟혀 얼마 못 가 돌아왔다. 자식 버리고 가서 잘 살아봤자 얼마나 잘 살겠니? 영영 안 오고 싶었는데, 그 로 끝까지 도망치고 싶었는데 이 망할 팔자!”

아이는 엄마가 와서 좋았지만 좋은 티를 낼 수 없었습니다. 엄마 손을, 엄마 옷자락을 덜 잡아야겠다고 다짐했을 뿐이었습니다. 엄마가 또 도망을 가면 이번에는 정말 돌아오지 않을 로 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엄마도 사랑하고 아빠도 사랑한 여자아이는 매일 불안했습니다. 어떤 날은 엄마가 좋았고, 어떤 날은 엄마가 미웠습니다. 어떤 날은 아빠가 싫었고 어떤 날은 아빠가 불쌍했습니다. 오늘은 어떤 다툼으로 누굴 싫어해야 하고 누굴 안쓰러워해야 하는지 머리가 아팠으니까요. 그 생각을 하면 집에 들어가기 싫었습니다. 화단에 앉아 나무를 쳐다보고 잎을 만지작거리고 풀을 뜯었습니다. 그러다 꽃을 보았고 향기도 맡았습니다. 벌레도 구경하고 에다 그림도 그렸습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엄마아빠가 살아온 길은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저들보다는 더 나은 길을 가겠노라 생각했지요. 아이가 하는 모든 선택에는 엄마와 아빠가 누린 자질구레하고 초라한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이 수북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당신들과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겠다고 말이죠. 아이는 인생에서 큰 결정을 할 때 더없이 신중했습니다. 기회비용과 가성비를 따졌고 사사건건 계산하고 고민하여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이가 중요한 선택을 할 때면 엄마아빠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당신보다 딸이 더 나은 길을 가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그들이 드러냈기 때문이죠.     


그렇게 말을 잘 들은 아이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어른으로 산 지 제법 되었습니다. 어른으로 부모보다 나은 길을, 나은 행복을 누리느냐 물으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행복은 어떤 길을 가느냐가 아니라 어떤 길을 어떻게 가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길을 어떻게 가고 있느냐고 묻는대도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아이가 걷는 길에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신중했어도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순간이 없었으니까요. 엄마 손을 놓칠까 불안했던 그때처럼 여전히 무언가를 붙들고 싶었던 적이 많았으니까요. 있을 것만 같던 행복 더미는커녕 자질구레한 행복마저도 잘 보지 못하고 살았으니까요. 행복을 찾는 삶의 태도는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년이 된 아이는 뭔가가 한참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래 고민하고 선택해도 에 대한 확신이 없고, 선택한 길을 성실하게 가도 만나는 행복은 아이의 부모처럼 자질구레하고 초라하니 이건 어쩌면 죽을 때까지 안 되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다시 태어나 다른 인간으로 살지 않는 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처럼 싸웠고 엄마처럼 짐을 쌌고 엄마처럼 도망가다 엄마처럼 돌아왔으니까요. 엄마처럼 아이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며 울면서 안았으니까요.     

 

그래서 그 여자아이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고민하고 선택해야 한다, 내 선택을 믿어야 한다, 내 길이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생각이 독이 되어 내면을 괴롭히고 누구에게나 잘 보이는 행복마저도 볼 수 없게 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요. 눈뜨면 주어지는 오늘만 걷기로 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허락된 조건에서 하기로 말이죠.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겠지요. 행복하면 행복해서 좋고, 불행하면 불행한 대로 배울 점이 있겠지요. 만약 내일 눈이 떠진다면 전날 배운 점을 바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바뀌거나 할 수 있는 정도가 변하기도 하겠지요. 아이의 길을 부모의 길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이고 다른 사람이니까요.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중


그 시절 여자아이는 길을 걸으면서 종종 생각했습니다. 좀 더 크면 지금 가까이 보이는 이 이 멀어지겠지. 넘어지면 바로 상처가 날 것같이 가까운 이 길이 조금 떨어지면 덜 넘어지고, 넘어지더라도 아프지 않게 되겠지.      


사실 엄마는 밤새 손뜨개로 아이 옷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솜씨가 좋았거든요. 아이에게 입히시고는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었었지요. 사실 아빠는 딸바보였어요. 아빠는 아이가 좋아하는 통닭이 식을까 작업복 속에 넣고는 찬바람을 헤치며 퇴근했고요. 아이가 맛있게 고기를 먹으면 아빠는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표정을 지었었어요. 아이는 엄마아빠를 보며 또 얼마나 행복하게 웃었겠어요. 그런 아이가 나이가 들어도 결코 길이 멀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어릴 때와 한치도 다르지 않지만, 더 먼 길을 가겠다는 과욕은 내려놨습니다. 그저 눈앞에 놓인 오늘을 새로 태어나듯 잔잔한 행복을 누리며 살고 싶습니다. 조금 욕심을 낸다면 자질구레하고 초라한 행복이 더 잘게 부서져서 생각 없이 걷는 발길에 챘으면 좋겠습니다.


그 여자아이가 걷고 싶은 은 그저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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