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밥일지, 천현우
만사 포기하고 사는 게 얼마나 편한데.
뭐라고 될 것 같은 희망을 품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데.
쇳밥일지, 천현우 (p.168)
저자에게 갑자기 사랑을 고백한 여자는 또 일방적으로 저자를 기다리겠노라 약속을 한다. “와 씨, 뭐 저런 여자가 다 있노.” 남자는 다리 힘이 풀려 철퍽 주저앉아버렸고, 대답조차 듣지 않고 가버린 여자를 떠올리며 남자는 혼잣말한다. 포기가 편하고 희망은 힘들다고,
거짓말이다. 포기는 절대 편한 결정이 아니다. 편하게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는 목적이 있다. 목적은 곧 희망이다. 포기가 그리 쉬운 일이었다면 세상은 참으로 조용했을 터. 쇳밥일지의 작가는 그 누구보다 강력한 희망으로 글을 썼다. 야물다 못한 강철 같은 삶은 당연히 진심이었고, 진심이 전달된 글은 아름다웠다. 저자의 희망은 쇳물이 흘러내리다 순순히 붙어버리듯 독자에게 전달되었다. 용접처럼 저자의 진심이 전달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쇳밥의 희망 기록은 용접물의 온도만큼 뜨거웠기에 가능한 일.
2023년 서이초 선생님의 죽음으로 많은 교사는 희망을 접었다. 열정을 가지는 순간 교사는 위험해진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탈 없이 시간을 보내라는 선배들의 자조는 교육을 포기하라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운 없게 아동학대 소송에 걸렸고, 무혐의라 밝혀지더라도 아프게 쓰러진 선생님 소식을 접하면 교육전문가라는 긍지를 고이 접어 숨기고 싶다. 이쯤 되니 드디어 포기에 이른다. 버티다 결국 포기라는 가장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된 셈.
3월 첫날 바로 알아보았다. 준호는 꽤 똘똘해 보였다. 마스크를 껴도 눈빛은 맑았다. 피구하는 걸 보니 공을 던지는 속도와 정확도가 단연 돋보였다. 교실 수업시간, 발표는 적극적으로 하지 않아도 시키면 주저하지 않았고 그 내용도 깊이가 있었다. 나는 단번에 준호가 좋았다.
무엇이 원인인지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턴가 준호는 아이들과 종종 부딪혔다. 주먹이 먼저 나가 피해를 호소하는 아이들이 생겼다. 수업시간 그 맑은 눈빛은 먼지처럼 흩어져버렸다. 대답은커녕 방금 한 물음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토록 열정적이던 피구마저 하기 싫은지 주변을 맴돈다. 방학을 마치고 2학기가 시작되면 좀 나아지려나 기대했건만 되려 안 하던 지각이 일쑤다. 담임선생님의 연락이 얼마나 불편한지 잘 알기에 나는 준호엄마에게 결코 연락하고 싶지 않았으나 등교가 늦어지자 어쩔 수가 없었다.
학부모와 긴 통화를 끊으며 내게 그 힘든 포기의 느낌이 왔다. 더 이상 준호를 좋아할 수 없겠구나. 집에서 준호는 아무 문제가 없단다. 지금도 아이와 자주 대화를 하고 있는데 아이는 학교생활에서 특별히 어려움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지각은 안 되는 일이니 집에서 신경을 쓰겠다고 했다. 자기 아들의 문제 행동은 선생님의 사견이지 않느냐는 느낌을 넌지시 풍긴다. 나는 혹 떼려다가 혹 붙인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다시 준호를 불렀다. 엄마와 내가 너를 위해 소통하고 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같이 노력해 보자, 어려운 점이 있으면 말해달라는 간절한 내 희망에도 아이의 눈빛은 차가웠다. 엄마와 소통하고 있다는 내 말에 준호는 자기 문제 행동을 고자질했다는 원망스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서서히 희망을 놓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좋아한다는 고백을 많이 한 것 같은데 아이는 내 고백에 움찔하지 않았다. 나와 좋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는 말과 행동에 나는 결국 그 어려운 포기에 다다랐다. 아이의 성장을 돕는 조력이 이 업의 정체성인데 나는 결국 하면 안 되는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고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만 지키고 싶었다.
그럼에도 내 일이 참 근사하다고 생각한다. 수업을 하는 내가 참 멋지다. 특히 역사수업이 그렇다. 5학년을 3년째 하는 이유도 2학기 사회, 역사가 재밌어서이다. 내가 좋은 교사인가 이런 생각은 위의 포기를 몇 번 겪게 되면 솔직히 암울하다. 그러나 수업하는 나 자신 자체는 그렇지 않다. 역사 속 인물에 빙의하여 혼자 연극하고, 내 견해를 곁들여 열정을 토할 때는 먼지같이 폴폴 날리던 아이들의 시선도 내게로 모이는 걸 느낀다. 아이들마저 흥분하여 역사적 사실에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 나는 더 신난다. 좋은 수업은 교사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가장 잘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니 아이들이 수업에 몰입하는 모습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저자가 타지생활에 우울함에 몸부림치다 괴로워하던 중에도 ‘이 몸뚱이는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내면을 망치질하고 명상하며 소설을 썼다’는 내용에서도 저자는 사실 ‘포기’보다 ‘희망’이다. 자해나 자살조차 그저 쓸데없이 부지런한 행위라고 하는 말도, 엄마의 수술 후 눈물을 흘릴 때 눈물은 슬플 때만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부분에서도 저자는 그 누구보다 희망적인 사람임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살다 보면 포기가 찾아온다. 창원시 팔용동의 작은 정밀공업회사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중 직원이 사고로 구급차로 실려가는 모습을 보며 ‘내가 누린 일상이란 그저 불행이 닥치지 않았기에 유지됐을 뿐’이라는 자조에서 보통의 삶에 대한 포기가 느껴졌다. 얼마나 간절히 ‘보통’을 원했을까. 잔업을 해도 에어컨 밑에서 쉬거나 샤워를 못해 땀으로 작업복을 걸쳐도 쉽게 생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보통의 삶에 대한 희망을 결코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내 정신건강을 위해 준호를 신경 쓰지 않기로 한, 즉 준호를 포기하기로 결심한 날, 또 준호가 눈에 들어온다. 수업시작 한참 뒤에나 교과서를 툭 꺼내더니 아무 데나 펼쳐 그림을 그린다. 그러다 연필로 구멍을 뚫고 찢기 시작한다. 나는 못 본 척한다. 나는 내 눈길을 기다리는 다른 아이들을 보기로 한다. 무신경하기로 한지 5분이나 지났을까. 준호는 짝과 수다를 시작한다. 나는 준호는 부르지 않고 짝에게 주의를 주었다. 준호는 나를 무심히 쳐다보고는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아이는 나를 보지 않았다. 다른 말로 나는 준호를 계속 보았다는 말이다.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구나. 나는 아직도 너에게 희망을 가지고 있구나.
‘모든 사람 사이를 호오로만 판단할 수 없으며 모호함의 경계 속에서 각자가 내린 판단으로 관계를 맺고 끊으며 살아간다’ 말한 저자는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꼭 나을 거라는 말을 하고 만다. 나는 솔직해지기로 했다. 수업을 마치고 준호를 불렀다. “나는 너를 만난 첫날부터 너가 좋았다. 왜 좋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내가 보는 너의 문제 행동에 원인을 알고 같이 풀고 싶은데 너도, 엄마도 말을 하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다. 솔직히 너를 포기하고 싶다. 노력해 봤는데 잘 안되더라. 아직 너를 좋아하기 때문인가 보다. 선생님은 너를 아직 포기할 수가 없다. 친구들 앞에서 수학문제를 척척 풀고, 예쁘게 글도 쓰고, 피구 할 때 날카롭게 공 던지던 너를 다시 보고 싶다. ”
결국 저자는 청강대 졸업 축사에서 이런 말을 하고 만다. “앞으로 여러분이 살아 견뎌야 할 세상은 분명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자신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깨닫게 되면서, 누구도 감히 흔들 수 없는 자신을 완성할 수 있을 거예요. 여러분 냉소하지 맙시다.”
나는 좋은 교사가 되기 글렀다는 내 차가운 비웃음은 좋은 선생님이 되길 바라는 누구보다 간절한 바람이었으리라. 살아가다 포기의 순간이 문득 찾아오더라도 포기를 더 이상 포기로 보지 않기로 한다. 포기란 희망이라는 굵직한 나무기둥에 슬며시 솟아나는 여린 잎이니. 또 다른 가능성을 품고 튼튼히 자라고 싶은 그 어려운 희망을 나는 '포기'라 명명하고 싶다.
다 잘될 거라고 희망하는 게 얼마나 편한데.
뭣도 안될 것 같은 포기를 품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