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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지우개 Nov 06. 2024

희미한 빛이 되는 존재이기를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Y에게          


너를 만난 건 1999년, 너와 헤어진 건 2018년이니 너와 19년을 함께했고 6년간 연락 없이 지내고 있네. 그래도 아직 희망적이라면 함께한 시간이 훨씬 길다는 점이랄까. 만남의 두께가 헤어짐의 그것보다 훨씬 두꺼우니 아직은 헤어짐의 벽을 부술 힘이 더 크다고 생각해.           


너는 나보다 한 살 많았고, 여고 선배였으니 당연히 나는 너를 언니라고 불러야 했지만 넌 나에게 언니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 그 마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로서는 선배를 친구로 삼는 일이 힘들지 않았기에 난 네 이름을 어렵지 않게 불러버렸다. 우린 고향이 가까워 수업이 끝나는 금요일 오후마다 같이 지하철을 타고 시외버스터미널로 갔어. 그때 우리가 나눈 대화는 주로 지루한 대학 수업에 대한 푸념과 돈을 벌게 될 미래, 진짜 하고 싶은 공부에 관한 것이었지. 너는 대학 4년이 너무 길다면서 빨리 졸업하고 싶다고 했어. 돈을 벌어도 여유가 없을 것 같다며 이내 어두워지곤 했지만 그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는 듯 넌 누구보다 대학공부에 열심이었지. 강의실 맨 앞에 앉아 강의 내용 하나라도 놓칠세라 필기하고, 질문에 대답하고, 눈을 반짝이는 너를 지켜보는 일이 난 참 좋더라. 나는 졸다가 듣다가 그림 그리다 먼 산 보다가 멍 때리다 너를 구경하니 당연히 학점이 좋지는 않았지만 넌 늘 날 인정해 줬지. 넌 머리가 좋잖아. 넌 글을 잘 쓰잖아. 난 너한테 인정받는 게 좋았던 것 같아.          


너는 우수한 학점으로 졸업했고 당연히 임용에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할 거라 나는 믿었지. 넌 서울로 응시했고, 운이 없었던지 불합격하고 말았어.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불합격했다는 사실에 동기들은 큰 충격을 받았지. 무엇보다 좌절한 건 너 자신이었을 거야. 그때 넌 처음으로 나와 연락을 피하더라. 나는 그런 네게 정말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위로라는 공은 아무리 잘 던져도 받는 사람이 그 공을 외면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 날아오는 공은 말 그대로 공격이기에 나는 내 진심이 네게 아프게 닿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 같아. 다행히 그 마음이 잘 전해졌는지 너의 힘든 재수의 시절도 우리는 사소한 일상을 늘 나누었지.          

 

그때부터였을까. 넌 항상 내게 기댔고, 난 항상 네가 기댈 수 있도록 힘주어 서 있어야 했어. 네가 편히 기댈 수 있도록 서있는 게 좋았는데 언제부턴가 버겁더라. 너를 만나면 네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네 푸념과 하소연들이 지겨웠을지도. 맞아. 어쩌면 나도 너를 향해 다리를 쭉 뻗고 편히 쉬고 싶었는지도 몰라. 넌 나를 만날 때마다 차곡차곡 쌓아뒀던 네 삶의 불평등과 불안과 불만족을 끝도 없이 꺼내 자랑하듯 펼쳐 보였지. 내게 보여주는 너의 ‘못난’ 이야기들을 제발 예쁘게 해석해 달라는 듯 조르는 네 얼굴이 난 싫어졌어. 물리적 거리도 아무것도 아닌 만큼 너무나 잦았던 너의 연락을 나는 어느 순간 피했지. 그럴수록 넌 내가 그럴 리 없다며 더 열심히 나를 찾았고 난 더 매몰차게 밀어냈지. 돌아선 내 마음을 확인한 너는 나를 그제야 스르르 놓아버렸어.          

한동안 나는 너를 일부러 잊고 살았다. 네게 상처 준 나를 잊고 싶었어. 돌아선 내게 서운함을 넘어서 분노하다 이내 슬퍼할 네 말간 얼굴이 떠올라 괴로웠거든. 내게 보낸 너의 마지막 편지에 너는 이렇게 썼지. ‘너는 왜 내 말을 듣기만 했니. 나도 네 상처를 간절히 보듬어 주고 싶었는데 넌 꺼내지 않더라. 나를 한없이 낮추면 너의 진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줄 알았어.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끝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날 밀어내기만 하는 네가 너무 원망스러워.’         

 

어쩌면 그때의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그런 빛을 좇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빛을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에게서 보고 싶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p44)          


너와 헤어진 지 한참 후 알았어. 나는 너를 친구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너는 나에게 사실 언니였던 거야. 언니라고 부르고 싶었던 거야. 난 너의 쌍둥이 동생처럼 언니!라고 부르면서 네게 사랑받고 싶었나 봐. 닮고 싶은 언니가 꺼내는 평범하고 못생긴 이야기들이 부담스러워 귀를 막고 도망친 셈이지. 2018년 겨울, 힘들게 털어놓은 나의 고민에 ‘너는 언제나처럼 잘 해낼 거야, 네겐 사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잖아.’라는 말이 어찌나 아프던지. 그때 너 역시 나를 친구로 보지 않고 언니로 대한다고 느꼈어. 너만 위로받고 싶구나. 내 진짜 마음엔 관심이 없구나. 그때 그렇게 너를 몰아냈다.     


내가 처음으로 했던 위로가 어쩌면 네게 위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이 쉽게 던지는 잔소리처럼 들렸을지도. 힘들었던 순간에도 네가 내 손을 놓지 않았던 건 너도 언니라는 책임감에서 벗어나 동생이 되고 싶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맞아. 우리는 친구라 부르면서 마냥 기대고 싶은 철부지가 되길 원했었나 봐. 차라리 처음부터 나는 네가 언니였으면 좋겠다고 선을 그었으면 지금 우린 달랐을까. 친구라고 부르면서 친구라는 균형감을 유지하는 일이 어려웠던 이유는 어쩌면 꼭 닮은 우리가 서로에게 빛이라고 여겨서였을지도. 너는 나를 친구라는 등불로 닮고 싶었고 나는 너를 언니라는 등대로 좇고 싶었으니까.           


이제는 아프지 않게 너를 떠올려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의지하던 형부마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내게 울면서 전화하던 네 목소리가 생각나. 검은 상복을 입고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내게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울던 너를 생각해. 말없이 내 가슴으로 털썩 들어오던 너를 위로할 수 있어 좋았어.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 대한 기대를 접고 눈을 마주하고 침묵하며 손잡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내 소중한 사람 Y. 내가 네게 달려간다면 너는 나를 안아줄까. 서툰 인생에서 만난 나와 꼭 닮은 사람에게 기대도 실망도 없는 공평하게 기대는 장면을 꿈꿔본다. 친구라 부르면서도 반반씩 언니와 동생이 되는, 서로에게 희미한 빛이 되는 존재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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