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 역사길(진두에서 덮을개)

by 물지우개

우리 집 유일한 테이블 위에는 ‘통영시 관광안내도’와 ‘한산섬 관광안내도’가 깔려있다. 이 지도 두 개가 테이블을 꽉 채우고 있어 다른 것에 눈을 돌릴 수가 없다. 먹을 때, 책 읽을 때, 받아쓰기 연습을 할 때, 행주로 닦을 때 테이블과 협업을 시작하기 전, 지도는 늘 우리를 안내한다. 그런데 어서 가보라고, 아직도 안 갔냐고 재촉하는 곳이 있다. 물론 한산도의 웬만한 곳은 다 가보았지만 ‘한산섬 관광안내도’가 한숨 쉬며 잔소리하는 그곳이 바로 ‘한산도 역사길’이다.


남편은 진주에서 있는 철인 3종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섬을 나갔다. 우리 셋만 남아있다. 사실 며칠 전부터 이어져 오는 몸살 기운으로 컨디션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지도의 잔소리와 아이들의 무료함이 나를 그 길로 이끌었다.


가을의 시작은 급격한 일교차와 함께 시작되었지만, 오늘 아침은 따뜻한 편이다. 우리의 코스는 ‘진두’에서 출발하여 정상에서 인증 사진을 찍고 ‘대촌삼거리’와 ‘소고포 갈림길’을 지나 제승당 근처 ‘덮을개’로 내려오는 7km 완주코스이다. 첫 번째 고지는 중턱에 있는 한산정이다. 이미 산은 가을 준비를 마쳤다. 새들은 갑자기 찾아온 어린이 손님이 반가운 듯 여기저기서 푸드덕거렸고 나뭇잎은 밟자마자 바스락거렸다. 며칠 전에 나 혼자 왔을 때만 해도 이 정도 볼륨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이들 재잘거림에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망산에 오르는 숲길은 중간중간 바다 풍경을 준비해 두고 있다. 땀이 나서 힘들다 싶어 잠시 멈추고 고개를 돌리면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힘이 들어도 표정은 곧 밝아질 수 있다. 올봄 처음 이곳 망산에 올랐을 때 아이들은 힘들다고 울부짖었다. 이러려고 새 등산화를 사준 거였냐고 원망했었다. 다시 내려올 산을 도대체 왜 오르는 거냐고, 이렇게 힘든 산행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거냐고 서연이는 나를 원망했다. 그런데 오늘은 의외로 잘 따라온다. 그간 단련이 되었을까? 애들은 멧돼지 발자국이 있는지 살피기도 하고 뱀 구멍도 확인한다. 학교 친구들과 다 같이 올라왔을 때 이야기도 꺼낸다. 누구누구는 힘들어서 정자까지만 왔다가 포기하고 내려갔지만 자기는 끝까지 완주했다고 자랑도 한다. 우리 아이들이 그사이 많이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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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정도 오르니 정자가 보였다. 서진이는 이곳에 산두릅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보니 지난번에 왔을 때 대고포에 사는 은찬이가 알려줬단다. 그런데 맛은 없다고 했단다. 한산도의 땅두릅만 먹어보고 망산의 산두릅을 먹어보지 못해 내심 아쉬웠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느라 땀이 살짝 나도 멀리 섬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땀이 식고 한기까지 든다. 이내 정상을 향해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봄에 본 진달래꽃 터널은 없고, 진달래라는 이름표만 앙상히 달려있다. 진달래는 벌써 다음 봄을 위해 동면기에 들어갔나 보다. 잎도 다 떨어지고 가느다란 가지뿐이다. 능선에 다다랐는지 내리막과 오르막이 번갈아 가며 나온다. 어느새 정상이다. 정상에서는 국립공원 아저씨 두 분이 휴식 중이셨다. 그래도 토요일이면 등산객이 제법 와 있을 법도 한데 관광객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서운했다.


“어? 망산 안내판이 쓰러졌네?”


아저씨들은 지난번 ‘콩레이’ 태풍 때 쓰러졌단다. 표지판 기둥석 두 개가 아예 넘어가 있다. 정말 대단한 바람이었나보다. 저 아래 우리가 걸어야 할 산들이 보였다. 아이들에게 오늘은 저쪽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일러주니 서연이는 또 올라가야 하는 거냐고 한숨을 쉰다. 많이 자랐다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정상에서는 세 갈래 길이 있다. 우리가 올라온 진두길, 야소길, 덮을개 길이다. 야소길은 진두길보다 완만한 편이지만 미끄럽다. 지난번 이 길로 내려오다가 발목을 삐끗해서 제법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 마지막은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인데 이 길은 나도 처음이다. 국립공원 아저씨들도 내려가고 있어 우리도 따라 내려갔다. 가파르긴 했지만, 숲길은 아늑하고 넓었다. 편안하게 내려오니 바로 대촌고개의 구름다리다. 이 다리가 등산로 일부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름이 ‘망산교’였다. 대촌으로 자전거를 타고 넘어갈 때 이 다리를 여러 번 보았지만, 야생동물들의 통로, 생태교인 줄 알았다. 우리가 다리를 지날 때쯤엔 아래로 빨간 마을버스가 지나가고 있었고, 저 너머 섬이 품은 대촌마을과 신거마을이 보였다.


이제부터는 능선이다.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었다. 계단도 있고 흙길도 있는데 중간중간 야생화들이 반겨주었다. 특히 보랏빛의 야생화들이 많았는데 그 중 완벽한 별 모양을 한 손톱만 한 야생화는 그 자체가 아주 아름다웠다. 손톱만큼 작았지만 단연 눈에 띄어 숲을 가득 채운 느낌이었다. 우리 셋은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고 꽃에 관해 이야기했다. 동물들이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 시간이 지나면 이 꽃은 무슨 색이 될지 상상도 해보고 내년에도 과연 이 자리에 있을까 궁금해하기도 했다.


나도 조금씩 발가락이 아파지는데 아이들은 얼마나 아플까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특히 진주 할머니를 닮아 무지외반이 벌써 튀어나온 서연이는 등산화를 불편해했다. 섬에 온 이후 유독 발이 너무 빨리 커져서 신발이 금방 작아지는 듯하다. 저 등산화를 살 때도 제법 여유 있게 샀는데도 벌써 발가락이 아프다고 칭얼거린다. 내가 도와줄 방법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서연이가 혼자 인내할 시간인가보다. 서진이는 장수풍뎅이를 찾고 싶은데 눈에 안 보이는지 답답해한다. 참나무를 살펴보면 분명히 있을 텐데 하며 참나무 푯말만 나오면 유심히 살핀다. 교실에 있는 장수풍뎅이를 위해서는 적절한 산란 목이 필요한데 아직 구하지를 못했다고 한다. 불을 피웠을 것 같은 돌담이 보인다. 망산 정상에 있던 것과 비슷한데 규모가 작았다. 바다가 가까이 있으니 이곳에서도 불을 피워 저 먼 곳과 연락을 했었나 보다. 망산 봉수대의 연락책이었을까. 낮에는 연기를 이용하고 밤에는 불빛을 이용해서 정보를 전달하는 봉수대에 대해 아이들과 이야기를 했다. 봉수대에 불을 피운다는 건 적이 있다는 뜻이겠지? 여러 가지 종류의 메시지가 있었을 거야. 그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하려면 정확하게 불을 피워야 하는데 불을 피우는 게 그리 쉽지가 않거든. 불 피우는 연습도 했겠다. 그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화를 주고받으니 힘든 것도 어느새 잊어버린다.


왼쪽으로는 마을이 어슴푸레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바다가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여기는 독암쯤이겠다. 조금만 더 가면 소고포가 나올 것 같아. 소고포만 지나면 곧 덮을개가 나올 것이다. 거의 다 왔다. 힘내자!


출발한 지 두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소고포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 잠시 쉬기로 했다. 아이들은 신발을 벗어 발을 주물렀다. 주물러서 좀 풀리거든 다시 걸어보자. 아픈 너의 발과 어루만지고 달래어 다시 힘을 낸 지금, 이 순간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구나.


멀리 제승당 앞바다가 보인다. 제승당에서 하선해 덮을개에서 등산을 시작하는 사람은 이곳이 처음 만나는 전망대겠다. 박경리, 유치진, 전혁림 등 통영의 예술인들을 안내한 표지판과 몇 개의 벽화가 우리에게는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고 알리는 선물 같았다. 이내 덮을개에 다다랐고 우리의 한산도 역사길은 끝이 났다.


아이들 얼굴은 발갛게 익었고 내 모자도 축축했다. 서진이는 생각보다 짧은 거리라고 거드름을 피웠다. 서연이는 아마 우리 학교에서 이 길을 완주한 사람은 자기밖에 없을 거라며 뿌듯해했다. 나는 지도의 잔소리를 듣지 않게 되어 마음이 가벼웠다. 3시간이 넘는 이 산행으로 우리 셋은 더 깊숙이 한산도 품속으로 안기는 느낌이다. 산은 다시 나에게 되묻는다.


“나를 기억한다면 다시 찾아주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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