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낯, 호접란

by 물지우개

2019년 3월, 1년간의 휴직이 끝나고 나는 학교로 돌아가 담임이 되었다. 이전보다 덜 흥분했고, 덜 화냈다. 더 웃었고 더 가만히 기다렸다. 쉼의 대가는 기대보다 넉넉했다. 그러다 문득 섬이 그리웠고 같이 놀던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그곳 냄새가 아련했고 풀과 나무, 꽃이 가물거렸다. 결국 두어 번 다녀왔다. 막상 쳐다보면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아프기도 했지만, 몰래 숨겨둔 초콜릿이 무사한 듯 감사했다.


드디어 여름방학이다. 출근이 일과에서 잠시 사라지고 맨 먼저 자리한 일정은 통영 친구들과 만남이다. 가족 없이 혼자만의 통영행. 시작은 자전거다. 십 분간 신나게 지하철역까지 달렸다. 오랜만에 보는 풍경들-노란 버스, 등원하는 아기들. 배웅 나온 할머니와 엄마들. 가방을 멘 초등학생, 중학생, 이어폰을 끼고 부지런히 걷는 직장인, 가게 문을 여는 주인, 지하주차장 입구에서 인사하는 경비원 아저씨들, 시내버스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 풍경을 지나 역에 도착해 자전거를 세웠다.


지하철에서는 가져온 책을 읽었다. 글자를 곱씹으며 읽고 싶어 자리가 있어도 앉지 않았다. 어설펐지만 나도 책을 쓰고 나니 책은 더 무겁고 확실히 위대했다. 이 책이 손에 오기까지의 힘든 과정을 알기에 가볍게 읽는다면 죄를 짓는 느낌마저 든다. 어느새 근무하는 학교 근처 지하철역이다. 간혹 흔들리더라도 더 집중해야겠다.

“통영, 한 장 주세요!”

“13번으로 가세요. 9시 10분 출발이에요.”

발랄한 내 요구에 매표원의 상쾌한 응답, 3분 후 출발이다. 표에 적힌 게이트를 찾아 달렸다. 내가 탈 버스게이트, 13번을 찾자마자 바로 버스에 올랐다.


지난번 아이들과 통영에서 부산 사상까지 타고 온 시외버스는 놀라웠다. 좌석은 편안했고 쏟아지는 졸음을 마음 편히 즐길 수 있었으며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도착했다. 이번에도 고민 없이 시외버스를 선택했다. 아이들도 없고 짐도 없을 뿐 아니라 혼자 가는 여행은 버스가 더 어울린다.


버스에는 손님이 나까지 4명이었다. 내가 12400원을 주고 표를 샀으니 4명 다해도 5만 원이 안 된다. 이 버스 회사가 정상적인 운영이 가능한지 걱정될 정도로 버스 컨디션은 최상이었고 에어컨은 빵빵했다. 무사히 나를 통영까지 실어줄 버스에 감사한 마음이 들어 조용히 벨트를 맸다.


잠깐 졸았는데 벌써 도착했는지 버스가 멈췄다. 그런데 창밖으로 보이는 장면이 낯설었다. ‘남마산’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버스가 도착한 곳은 통영이 아니었다. 문이 열리더니 기사님이 일어났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음과 동시에,

“손님, 옆에 버스로 옮겨 타세요. 저 버스가 더 빨라요.”

순간 잘못 들었나 했다.

“네? 내리라고요?”

“저 버스가 더 빨리 출발해요.”

아니, 아무리 손님이 없어도 그렇지, 낯선 데로 데리고 와서 버스까지 바꿔 타라니. 너무 하다 싶었다. 그래, 솔직히 손님은 너무 적었고 버스는 심하게 좋았다. 어쩔 수 없이 버스를 바꿔 탔다.


곧 다른 승객들이 들어왔다. 역시 내 걱정은 쓸데가 없었다. 이해는 하지만 마음이 상했다. 4명이더라도 통영으로 가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이 아닌가. 미리 양해를 구했다면 모를까.

기사님은 방금 탄 승객들에게 표를 걷으며 표가 없는 나를 슬쩍 보더니,

“부산에서 직행 버스를 타야지, 잘못 탔어요.”

“네? 아니에요. 저는 분명히 버스를 바로 탔어요.”

“12번 게이트도 있고 13번 게이트도 있어요. 13번 게이트는 직통인데 12번은 완행이에요.”

“아닌데... 저는 분명히 게이트를 봤고, 9시 10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탔어요.”

“아줌마보다 내가 더 잘 알지 않겠어요? 10분이 아니라 12분에 출발하는 12번 게이트, 완행버스를 탔다고요.”

“네... 그럼 통영에 언제 도착해요?”

“진동, 고성 들렀다 가면 한 시간 정도 걸려요.”

대화가 끝나도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많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봤지만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나는 철저했고 분명했다. 거의 정확했고 모르면 빠르게 검색할 줄도 알았다. 나와 함께 부산에서 버스를 탄 아주머니께 물었다.

“우리가 탄 버스가 9시 10분 버스 아니었어요?”

“아니요, 9시 12분 버스였어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버스 컨디션이 좋다고 감탄하며 버스 회사를 동정했다. 낯선 정차를 이해한다고 넉넉한 척 바꿔 탔다. 잘못을 정확히 알려주어도 그럴 리 없다고 꼿꼿이 말했다. 낭떠러지 표지판을 보고도 당당히 걸어 나가떨어지면서도 나는 똑똑하다고 처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책 한 권 썼다고 진짜 작가라도 된 듯 잘난 척했다. 세상 모든 풍경 사랑하는 듯 여유로운 척했다. 모든 사정 다 알아주는 듯 높은 척했다. 휴직하며 책 한 권 냈다고 나란 인간이 업그레이드될 리가 있나. 나는 아집에 똘똘 뭉친 그저 그런 인간일 뿐이다. 어쩌면 휴직과 책으로 자만감이 덧붙여 더 그저 그런 인간이 되었을지도.


내 민낯을 보고 나니 어지러웠다. 앞으로 한 시간이나 이 버스에서 고스란히 민낯을 감당할 생각을 하니 정신이 없었다. 뭐든 해야 했다. 가방 속에 책이 보였다. 얼른 꺼내 읽기 시작했다. 나에게 독서는 기차나 지하철은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버스나 비행기는 불가능했다. 독서로 인한 두통과 메슥거림은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데가 아니다. 갑자기 나타난 민낯은 그동안 내가 생각해 왔던 나를 거부하게 만들었다. 역시, 지하철보다 글자가 더 잘 들어왔다. 쉽게 곱씹어졌고 두통 따윈 없었다.


버스는 두세 군데 더 정차했고 책을 다 읽으니 통영에 도착했다. 숨겨둔 초콜릿 같은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나는 꽃을 샀다. 식물이 잘 자라는 환경-바람도 잘 통하고 물도 잘 줄 때는 절대 꽃을 피우지 않는 호접란, 팔레놉시스다. 대부분 꽃은 갈증과 추위에서 견디다 마지막으로 있는 힘을 끌어 모아 핀다.


민낯이 갈증과 추위를 주더라도 견디다 보면 언젠가 꽃이 되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선물 같은 민낯을 만나 더 많은 부끄러움과 고통을 감당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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