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이방인 같은 삶을 살았노라. 삼십 평생을 사는 동안 한 자리에서만 살았음에도 언제나 나는 내가 이방인 같았다. 같은 시공간 안에 있으면서도 나는 언제나 한 발짝 뒤에 물러서 있었다. 내가 조금 별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정작 나는 내가 어떤 점에서 별난 것인지 알지 못했으니 확실히 나는 이방인이 맞았다.
2021년 3월 4일(목) | 책 정리하는 하루
내 앞에는 삼만여 권의 책이 있다. 자고 일어 난 이부자리도 정리 안 하는 내가, 이곳에서는 청구기호가 뒤죽박죽 섞여 엉망이 된 서가에 책을 정리해야 한다. 나는 마치 콩쥐가 된 것 같다. 얘, 오늘 내로 이 쌀과 콩을 다 나누어서 담아야 한다. 그런데 나한테는 두꺼비도 선녀도 없어.
2021년 4월 11일(일) |나는야 날씨 요정!
늘 내 뒷모습을 담아 주는 잔소리쟁이와 함께 즐거운 남해 여행. 남쪽은 따수워서 행복했다.
2021년 6월 4일(금) |서울랜드 탐험
장미가 지기 전에는 가야 한다고 했는데, 정말 지기 직전에 다녀왔다. 내가 늙는다 늙어, 말을 너무 잘 들어서.
2021년 6월 23일(수) | 도망가자!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 도서관과 사서 업무에 관심을 가졌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일 년 조금 넘게 근무한 지금.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다. 일 폭탄이다! 잽싸게 도망가자! 죽게 생겼다! 잽싸게 도망가자!
2021년 9월 4일(토) | 바다가 보이는 곳에 살고 싶어
날씨가 쓸데없이 좋았던 부산 여행. 바다가 보이는 곳에 살고 싶어.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
2021년 11월 2일(화) | 제주의 가을
아무도 올라가지 않는 오름을 올라보겠다고 도전했다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꿩이 튀어 오르는 경험을 했다. 포켓몬스터 게임인 줄 알았다. 심장의 건강을 위해 두 번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결국 후다닥 다른 오름으로 도망갔다.
우도를 자전거로 한 바퀴 돌고 싶어서 자전거 열심히 배웠는데, 언젠가는 제주도 한 바퀴도 돌 수 있겠지.
제주의 가을은 언제 와도 새롭고 아름답다. 역시 바다가 보이는 곳에 살고 싶어.
2021년 12월 21일(화) | 고약한 12월
12월의 도서관은 안녕과 안녕과 안녕의 연속이다. 어제는 네 번의 안녕이 있었다. 오늘은 두 번의 안녕, 모레는 한 번의 안녕이 예정되어 있다.
도서관에는 예산을 틀어 쥔 부서마다 제각각 이름 붙여 놓은 십 여 개의 계약직이 있지만(이름만 다르고 하는 일은 비슷한), 이들을 위한 퇴직금은 어느 부서도 준비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12월 한 달간 손 맞잡고 안녕을 전하는 일에 바쁘다. 그러는 와중에도 또 누군가는 1월부터 새로운 이를 맞을 준비에 바쁜데, 어떤 의미로든 안-녕이다.
12월은 사업을 마무리 짓는 달이다. 나는 한 해 동안 운영한 수 십 개의 사업에게도 안녕을 고하고 있다. 매 년 예정된 안녕인데도, 왜 매 년 이렇게 어려운 안녕인지. 올 해에는 함께 사업을 진행했던 셋 중 둘이 내게 안녕을 외치고 호다닥 떠나갔다. 혼자 남은 나는 유치원 하원 시간처럼, 사업들을 길게 줄 세워놓고 하나하나 어르고 달래 가며 (품 안에 30페이지짜리 결과보고서를 하나하나 넣어주며) 안녕을 고하고 있다. 아직 줄은 저 쪽 코너 뒤까지 이어져 있다. 앞으로 회사에서는 음력 날짜를 세기로 했다. 신정 전까지는 다 떠나보낼 수 있겠지. 이럴 때의 안-녕은 마치 퇴마 의식 같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도서관에는 천장까지 닿는 큰 트리가 세워졌다. 트리 완성을 앞두고 콘센트를 잘 못 꽂아 도서관 1층의 전압기가 터지는 사고가 있었던 이유로, 아직 트리의 전구는 켜지 못했다. 1층의 전원이 전부 나가는 큰 사고였다. 사고를 수습하는 데에만 8시간이 걸렸다. 깜깜한 도서관 1층에서 직원들은 급하게 챙겨 내려간 노트북과 핸드폰 불빛으로 업무를 보았다. 도서관을 방문하는 어린이들은 트리에 불이 들어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 도서관의 시설담당자는 아직 벌렁거리던 심장을 갈무리하지 못한 고로 언제 불이 켜질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어린이들은 트리에 달린 곰돌이며 토끼에게 안녕, 안녕 인사한다. 어린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안-녕의 대상이다.
어젯밤, 도서관의 지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치킨을 먹고, 곱창을 먹고, 케이크를 먹고 안녕을 했다. 떠나는 직원이 내게 보온 머그컵을 선물해줬다. 이제 금세 차가워지는 커피도 안-녕이다. 떠나면서 온기를 남겨주다니 고약한 사람이다.
2021년 12월 22일(수) | 사서 사칭하기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면 모두가 나를 사서라고 부른다. 이 OO 사서님, 이 사서님, 사서 선생님… 나는 사서가 아니지만, 짐짓 사서인 척한다. 미술관에서 일할 때는 모두가 나를 학예사라고 불렀다. 이 OO 학예사님, 이 학예사님, 학예사님… 나는 학예사가 아니지만, 짐짓 학예사인 척했다.
내가 사서가 아니라는 것을, 학예사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공공기관의 다양한 직렬과 나의 업무와 나의 전공과 나의 가치관과 나의 직업윤리와나의…를 마치 면접 보듯 구구절절 소개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나는 그 모든 질문이 그저 여상이 흘러가는 것임을 알았다. 어차피 사람들은 내가 이 OO 사서인지, 이 OO 학예사인지, 이 OO 사원인지, 이 OO 9급 나부랭이인지 관심도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OO 사서님, 부름에 두 어 번 고갯짓 하는 것으로 사서를 사칭한다.
2021년 12월 31일(금) | 잘 가, 2021년
2021년 마지막 해를 을왕리에서 떠나보내 주었다. 잘 가, 2021년. 어차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겠지만. 맵지도 달지도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던. 맹숭맹숭했던 네가 그리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생각나는 때가 있겠지. 그래도 넌 돌아와 주지 않을 테니, 그리워하진 않을래.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