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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춥다물 Nov 03. 2023

발레리와 엠마뉴엘의 집 1

3개의 거실과 외부 블라인드

Lille, France 2016

 줄리와 티보가 결혼한다고 했다. 그 청첩장을 받은 런던의 집에서 나는 그 둘이 이태원 길거리에서 갑자기 멈춰 서서 길거리 버스킹 연주에 맞춰 커플 댄스를 추던 밤을 생각한다. 런던으로 도착한 양초 씰이 부착된 아름다운 청첩장에는 내 이름이 손글씨로 적혀 있었고 참석이 가능하면 답변을 바란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나는 당연히 빠르게 답변했다. 결혼 정말 축하해! 꼭 갈게.


 한 달 후 줄리가 유로스타 기차역 중의 하나인 릴역으로 마중을 나왔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와 집으로 가는 15분 동안 나는 차를 운전하는 줄리에 모습에 반하며, 내 영국 정착 얘기와 줄리의 결혼식 얘기를 나웠다. 둘 다 조금씩 힘들었겠네라며 정차하는 시간에 지긋이 눈을 마주쳤는데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아직은 안돼! 라며 줄리도 나도 금방 눈을 돌렸다.


 줄리의 어머니인 발레리와 아버지인 엠마뉴엘은 릴에서 나고 자라 만나 결혼했다. 아이 3명을 낳고 방이 4개인 이 집으로 이사 왔는데 그중의 첫째인 줄리가 프랑스 회사의 한국지점에 취직했을 때 딸을 보러 처음 한국에 방문한 그 부부를 역삼동 소갈비집에서 처음 만났다. 엠마뉴엘은 식사 전 앉자마자 와인리스트에서 뒤에 있는 와인을 '줄리를 많이 도와줘서 고마워, 내가 대접할게'라고 먼저 시켰고 발레리는 식사 후 '너도 담배 줄까?' 라며 나에게 담배를 권했다. 나는 당연히 그들에게 완전히 반했다. 그 근사한 줄리의 부모님의 집에 초대되어 왔을 때 나는 약간 소름이 돋았다. 줄리가 한국에서도 꼭 게스트룸이 하나 더 있고 공용 공간이 큰 집에 살았야 했던 당연하고 부러운 이유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집을 Mansion, 저택이라고 부른다.


 프랑스 북부 도시 릴에 위치한 이 집은 내가 묵었던 집 중에서 크기, 디자인, 역사적인 면에서 가장 좋은 집 중 하나이다. 총 2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집은 큰 직사각형의 평면에 구조벽에 맞춰 여유 있게 공간이 구성되어 있다. 제약이 없는 것이 오히려 어려운 게 평면 디자인인데, 이런 큰 규모의 사각형을 주고 평면을 구성해 보라고 이제까지 어떤 집을 봐 왔는지, 살아봤는지 티가 난다. 나도 건축학부 시절 가상의 집에 거실을 이미 두 개나 넣었는데 도대체 또 뭘 넣어야 하는 건지 텅 빈 도면을 보며 괴로워했었으니까. 이 집에 살아봤거나 방문했더라면 집에 거실이 3개일 수 있고 그런 집에서는 70-80여 명이 오는 파티를 개최하기도 한다는 걸 미리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1층/ 사진을 찍은 방향이 화살표로 표시되어 있음, 도면의 아래쪽 선은 외부 블라인드

 앞마당을 지나 스테인드글라스로 2층까지 장식된 현관을 들어오면 2층으로 출입하는 계단홀이 바로 나온다. 이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되는 안정적인 평면구성이다. 왼쪽으로는 작은 거실 오른쪽으로는 큰 거실이 배치되어 있다. 홀을 지나 리셉션 룸의 레일문은 대부분 닫혀있었지만 큰 딸의 결혼 전 파티 같은 큰 일에는 활짝 열리게 되어있다.

 오른쪽의 큰 거실은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함께 다과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벽을 꽉 채워 천장까지 올린 장식장이 있어 책과, 그릇, 장식품 등 수납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왼쪽의 작은 거실은 창밖이 보이고 천창도 있어서 혼자 휴식을 취하거나 적은 인원이 모여 오붓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장소이다. 따뜻한 색감의 천으로 덮인 실용적인 소파와 하늘하늘한 꽃과 튀지 않은 그림들이 계속 이 공간에 머물고 싶게 했다. 주방 가까이에는 아일랜드형 테이블도 있어 주방을 받쳐 주는 파티를 위한 준비실로 사용되기도 한다. 가장 오른쪽의 외부창고는 외부 정원에서 접근이 가능하고 정원용품, 가구, 자전거등을 저장하는 용도로 쓰였다. 외부 데크와 연결되어 있는 문은 프렌치 도어로(전체가 유리로 되어있는 문 형식, 주로 양개문) 주방에서 쉽게 출입이 가능해 날이 좋은 날에는 데크에 있는 테이블에서 긴 식사를 했다. 저 테이블에서 거대한 정원을 바라보며 프렌치프레소로 내린 커피와 오렌지 주스에 바케트와 소금 덩어리가 씹히는 버터와 산딸기 잼을 곁들여 먹고 탄성이 나왔던 것 같다. 정원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이 글의 처음까지가 정원의 크기라서, 정원은 도면에서 생략되었다.


  창이 사방으로 많이 난 이 집은 남향의 유리창에 외부용 블라인드가 모든 층에 설치되어 있었다. 유럽의 주거에서는 외부 블라인드나 외부 셔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유럽의 북쪽으로 갈수록 여름철 밤까지 해가 떠 있어 밤 시간 빛을 차단하는 암막의 역할도 있지만 건축환경에서 더 중요한 역할은 열 차단이다. 햇볕은 유리창 밖에서 차단할 때와 안에서 차단할 때 실내 온도 차이가 엄청나다. 외부에 블라인드를 설치하면 캐노피나 차양 없는, 남향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의해 방안이 뜨거워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한옥에서는 이 역할을 처마가 한다. 이것이 바로 패시브 하우스 건축 설계 시 남쪽에 처마나 차양을 필수로 설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줄리의 가족과 친지, 가까운 친구들만 모인 이 결혼식 전 파티에서 나는 큰 환대를 받았다. 줄리와 티보가 '한국생활을 할 때 큰 도움을 줬던 좋은 친구'라고, '건축가'라고 '그 한국인 친구가 지금 런던에 사는데 릴까지 유로스타 타고 올 거'라고 모든 사람들에게 말해놨기 때문이다. 이 문장들은 말로 전해 들으면 왠지 더 멋지게 들릴만한 문장들이었다. 이 문장들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져 '줄리와 티보의 목숨을 구해준 건축가 한국인 친구가 서울에서 온다'의 문장으로 와전됐다.


 다들 나더러 자꾸 앉으라고, 누우라고 했다.

    "시차 적응이 안 됐을 텐데 정말 피곤하겠구나, 저기 자리에 좀 앉으렴."

    "시차 적응이요? 1시간 밖에 차이 안 나는데..."


    "줄리가 그때 사고가 나서 엄청 당황했었다고 들었는데, 도와줬다는 게 바로 너구나?"

    "응? 무슨 사고? 그건 내가 모르는 일인데. 혹시 티보랑 같이 경찰서 같던 거 말하는 거야?"

    "티보가 경찰서를 갔다고?"

    "응?"

    "응?"

 이렇게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인가 의심이 들 때 더 이상 말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한 사람과 너무 오래 대화하지 않고 급히 샴페인을 들이키며 잔을 채워야겠다고 자리를 피했다. 처음에는 '나는 한국 태생이지만, 지금은 영국에 살아서 런던에서 2시간 기차 타고 온 것이며 시차적응은 필요 없다'라고 웃으면서 정정하다가, 20명쯤 같은 말을 하고 나서는 누가 또 '네가 어젯밤에 서울에서 왔다던 친구구나' 물어오면 '맞아, 그게 내가 맞고, 시차 적응이 안 돼서 너무 피곤하다 잠시 실례하겠다.'라고 자리를 피했다. 모두들 릴에서는 잘 보기 힘든 까만 머리의 까만 눈의 나와 한 마디씩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눈치싸움 중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브누아라는 줄리의 삼촌은 나에게 자신이 한국의 영화와 산업과 경제를 잘 알고 있고, 자신의 아들도 혼자 독일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너와 처지가 비슷하다라며 나중에 꼭 둘이 만나면 좋겠다고 베를린이랑 런던은 3시간 밖에 안 걸린다고 30분째 대화를 이어나갔다. 내가 벌컥 들이킨 샴페인잔이 10분이 넘게 비어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넌 건축가니까 우리 집에 꼭 와 봐야 한다고, 우리 가문의 오래된 저택인데 많이 낡았지만 우리가 아직 아끼며 살고 있으니 보여주고 싶다고 몇 번이고 얘기했다. 초대인지 명령인지 모를 말이었지만 나는 무엇이든 하자고 하면 불법이 아니고서야 따라나서는 이이기 때문에 파티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되기 전에 5분 거리인 브누아네 집에, 브누아의 가족들과 함께 다녀왔다. 그 오래되고 아름다운 저택을, 안 가봤으면 후회했을 집을, 1년 후 다시 방문하여 며칠 묵게 될 거라곤 이때는 생각하지 못했다. (루시앙의 집 예고)


1층 화장실의 비누 받침


 다시 파티 2부를 위해 줄리의 집으로 돌아왔다. 프랑스 친구들이 사는 곳에 가면 항상 욕실에 있었던 바디워시, 핸드워시 제품이 있는데 여기도 바로 그 Le petit marseillais 제품들이 있었다. 그럼 나는 욕실에 오래도록 서서 하나씩 모두 다 향기를 맡아봤다.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레아네 부모님 댁에 있었던 장미향이었다. 그 후로 나는 프랑스 집에 가면 꼭 욕실에 들어가 코를 활짝 열고 냄새들을 구경했다. 1층 화장실에는 같은 제품의 비누가 너무도 예쁜 비누받침에 올려져 있었는데 나는 아직도 이것과 비슷한 비누 받침을 찾으려고 중고가게를 그냥 지나치치 못한다. 지금도 프랑스 친구들의 집 사진들을 열어 보고 있으니 사진에서도 le petit marseillais 장미 향이 나는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이 집에서 내가 제일 좋았던 건 바로 방과 욕실, 화장실들이 모여있는 이 집의 2층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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