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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춥다물 Oct 20. 2023

레아의 집

'ㄱ'자 평면의 편리함과 줄리엣 발코니

Bordeaux, France 2016

 레아가 보르도로 이사 갔다고 했다. 나만 말도 안 돼! 하면서 깜짝 놀란 건 아니었다. 얘는 파리에서 태어나고 평생 부족함 없이 자라면서, 선하고 호기심 많은 성정으로 온갖 세련된 음악과 멋쟁이 친구들을 알고, 할머니가 소싯적 입으시던 빈티지 클로에를 무심하게 입고, 에펠탑이 보이는 파리 한 복판에 멋쟁이 부모님과 살았었으니까. 그런 레아가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와서 삼각김밥 참치마요맛에 완전히 중독된 것과 신 김치를 나보다 더 좋아하게 된 것은 되돌아보면 정말 재밌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레아도 느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대부분의 파리지엔느는 자신이 삼각김밥 참치마요맛에 중독되어 버릴 가능성을 평생 알아가지 못한 채 계속 파리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참치마요 중독자는 그래서 파리를 떠나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그 결심에  보르도는 부모님 고향집과 가까운 지방에서 제일 큰 도시로 가장 유력한 후보였고 안목도 좋고 능력도 좋은 레아는 직장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난 그 꼴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봐야 했다. 이 멍숑히(레아의 불어 억양이 들어간 멍청이)가 또 얼마나 예쁘게 살고 있는지 가서 잘했다고 아주 칭찬해줘야 하니까.

 역시나 현대적이고 고전적인 그의 안목이 집에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이름도 예쁜 빅토르-휴고길의 이 멋진 집에는 건축가인 레아와 영상일을 하는 남자친구 마티우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ㄱ 자의 평면이 중앙의 거실을 중심으로 실용적으로 구성된 루프탑 플랫이었다. 주방과 거실이 단차로, 유리문으로 분리된 것도 좋은 점이었다. 식물을 좋아하는 레아는 거실에 갖가지 식물이 가득했는데 남향에 난 줄리엣 발코니(돌출형 발코니)에 식물을 내다 놓고 비를 맞히고 햇볕 샤워를 시킨다고 했다. 남쪽으로 과하지 않게 창이 나 있어서 여름에 너무 더워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침실은 레아와 마티우처럼 간결하고 아늑하게 은은한 스탠드와 화분하나만 있었는데, 꾸미지 않은 멋이 집 안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역시 레아는 좋은 안목으로 좋은 파트너와 좋은 공간에 있구나. 마티우도 그걸 알기 때문에 처음 만나는 여자친구의 외국인 친구를 거실에 며칠이나 재워주겠다고 승낙한 거겠지. 마티우와 나는 중간 연결자인 레아의 안목에 누가 되지 않게 처음에는 봉준호, 줄리 델피 얘기로 간을 보다가, 요 것 봐라, 멍숑히과네? 눈치를 채고 나중에는 최대한 재밌는 얘기를 더 많이 하기 위해 개그 배틀을 하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다이닝 룸에서 거실 소파를 오가며 내리 6시간 수다를 떨다가 나는 그제야 지금이 보르도 와인축제 기간이라는 것, 심지어 오늘이 마지막 날임을 알게 되어 큰 충격에 빠졌다.

    "아 그래서 와인 시음이 많았구나... 길거리에 와인병도 널브러져 있고. 나 지금 일 년 중 제일 비싼 보르도행 기차표를 끊고 그게 왜 비싼지고 모르고 있었던 거네?"

레아가 그제야 폭소를 터뜨리며 속마음을 이야기했다.

    "난 사실 널 보는 게 너무 걱정됐어. 5년 만에 만나는 네가 영국발음으로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고, 우아한 '어른'이 되어있을까 봐. 난 영어도 많이 잊었고 5년 전이랑 변한 게 하나도 없거든. 네가 그대로라 너무 다행이야."

    "고맙네??? 내가 너무 고맙지, 너도 정말 5년 전 멍숑히 그대로거든. 나도 너처럼 영원한 멍숑히로 남을게."

  우리는 그렇게 며칠을 마을을 돌며, 거실에 둘러앉아, 김치전과 하몽을 곁들여 와인을 마셨다. 거실에서 먹었던 바게트빵과 하몽, 토마토, 올리브유 조합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혀 끝에 느껴진다. 어떤 공간은 멋진 평면보다 개그 배틀로, 눈물을 흘리며 웃다가 와인을 뿜는 기억으로 따뜻하고 선명하게 남을 것이다. 이 집에서 특히 좋았던 것은 단차가 있는 거실 옆 다이닝룸 식탁에 앉아 있는 레아와 마티우이다. 그들은 내 기억 속에서 지금도 바보처럼 웃고 있다.


현재 레아는 더 작은 도시로 이사를 가 집을 사서 고치는 공사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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