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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춥다물 Nov 07. 2023

발레리와 엠마뉴엘의 집 2

옷장안의 세면대와 문 세개달린 욕실

Lille, FR 2016

 2층은 침실과 욕실들로 구성되어 있다. 발레리와 엠마뉴엘의 방(master bedroom)은 전용 욕실, 화장실이 있는 엔스위트형 방이다. 좌우가 대칭인 위계가 확실한 이런 평면에서는 중앙에 자연스럽게 마스터 베드룸(안방)을 계획하고 정원을 한 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줄리엣 발코니도 방 정 중앙에 배치한다. 이 방에는 직접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정원에서 보이는 저 멋진 발코니와, 복도에서의 문 위치, 왼쪽의 세탁실, 화장실의 크기로 미뤄봤을 때 추측했던 공간이다.  

 그리고 나머지 방들은 줄리, 토마 비올렛이 각자 쓰는 방이고 모두 대학으로, 직장으로 독립을 하고 나가서는 5명이 모두 집에 모이는 일이 적어져서 그중 빈 방은 손님방으로 쓰인다. 나머지 공간은 세탁실, 욕실, 화장실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내가 묶었던 방은 비밀의 옷장이 있는 비올렛의 방(bedroom3)이다.


 도착한 날 줄리는 내가 비올렛의 방(bedroom3)을 쓰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방(bedroom2)은 이미 결혼 전 파티를 위한 짐으로 가득 차서 재워 줄 수가 없어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나는 소파에서도, 바닥에서도 잘 수 있고, 술을 많이 마시면 그것은 정말 쉬운 일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방을 보여주러 함께 올라온 비올렛에게 물었다. 방이 너무 예쁘다고, 재워줘서 고맙다고 근데 손은 어디서 씻을 수 있는지 물었다. 비올렛은 옷장의 오른쪽 문을 가리켰다.

    "저 안에 있어. "

나는 화장실 문이 옷장문처럼 생겼다고 의아해하며 문을 열었다. 근데 벽장에서 나온 건 바로 세면대였다.

아. 바로 그거 구나! 그의 방엔 바로 그 이미지로만 보던 '옷장 안의 숨겨진 세면대(hidden basin wadrobe)'가 있었다. 유럽의 화장실은 바닥에 배수구가 없는 건식:dry room 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세면대가 방에 있는 것이 생경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손도 씻고, 발도 씻고, 종종 바닥에 물도 찌끄려줘야 하는 습식:wet room 욕실에 익숙한 한국사람들에게는 호텔이나, 병원의 병실이나 진료실에서나 볼 수 있는 세면대이다. 근데 이게 옷장 안에 들어가 있다고? 이 방에 살면 양치질은 백번도 하고 아무리 술에 취해도 1차, 2차, 3차 클렌징까지 하고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은 뭐 입을까 대신에 오늘은 어떻게 공들여 씻어볼까 하게 되는 이 옷장 세면대를 활짝 열고 공들여 세면을 하고 양치를 하면 내가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었다. 이 옷장 세면대는 씻기 싫어하는 어린이방 최고의 계획일 것이다.

    2층의 외부 창에도 외부 블라인드가 모든 남향의 창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 높은 천장과 길고 좁은 창의 외부 블라인드를 비올렛이 다 닫아줬다. 아침까지 푹 잘 수 있게 말이다. 창 아래에 난 깊지 않은 선반에는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높은 천장에서 길게 드리운 커튼들은 일부러 창 크기보다 크게 제작되어 한 벽을 온통 덮을 수 있게 장식되어 있다. 장난꾸러기 같은 막내 같은 귀여운 비올렛과, 실크 스카프를 청바지 벨트로 묶어 쓰는 멋진 비올렛 모두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나는 그의 방에서 잠깐 비올렛이 되는 상상을 해 봤다. 그러나 다음 날 다시 5명이 함께 하나의 화장실을 공유하는, 런던의 집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면 조금 울적해졌으므로 그런 상상은 금방 그만두었다.




 그리고 정말 흥미로운 욕실은 바로 토마와 줄리의 방과 사이의 공유 욕실이었다. 욕실 겸 화장실이 두 개의 방으로 연결된 방식은 오래된 서울의 오래된 고급 주택에서 본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3방향으로 문이 난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거 누군가 사용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문을 열게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이 됐는데, 생각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화장실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욕실의 경우는 달랐다. 이 욕실은 세면대와 샤워박스만 있는 욕실이었다. 그래서 사용하는 내내 물소리가 나고 특히 야간에는 불이 켜진 것이 확실히 보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사용하고 있을 때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되는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집에 오래 살게 되면서 혹시 평소에 씻지 않는 시간에 사용한다거나 외부인이 쓸 때 서로 고함을 지르는 방식(누가 방에 있건 말 건, 그게 무슨 말이든)으로 알린다고 했다.

    "바케트!"

 그러면 2층에 있는 줄 알았지만 1층에 있는 줄리는 못 듣는다. 그리고 토마의 샤워는 시작한 줄도 모르고 끝나 있을 것이다.

    "쏘씨송!"

 토마는 방에서 헤드폰을 낀 채 유튜브를 시청 중이었지만 누군가(줄리일 것이 분명) 고함치는 소리에 헤드폰을 벗었다. 연이어 샤워실에서 쏴아- 하는 물소리가 난다. 토마는 '뭐야 일찍 들어왔네' 읊조리며 다시 헤드폰을 착용한다.

 다만 문이 3군데로 다 열려 있는 경우에 들어가면서 문을 3군데 모두 닫아야 하는 게 조금 귀찮을 수 있는데 일단 샤워를 하고 나서는 나체로 혹은 수건만 두르고 자신의 방으로 쏙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샤워 동선의 거의 모든 것이었다. 이 디자인은 내가 설계할 미래의 내 집에 적용될 것이고 그전에 아이들이 많은, 건축주를 만날 수 있기를 나는 여전히 바라고 있다.


  성대한 결혼 파티가 끝난, 다음날 아침 온 집이 조용했다. 나는 미리 예매해 둔 오전 9시 30분 기차를 타기 위해 8시에 일어나 줄리와 토마 방 사이의 욕실로 들어가 조용히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줄리와 티보는 곯아떨어져 일어나지도 못한 것 같았다. 오늘 기차역까지 태워주기로 약속한 토마의 방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이 없었다. 어제 파티 내내 손님을 계속 들여보내고 또 끊임없이 돌려보내던 그의 믿음직스럽지만 지친 얼굴이 떠올랐다. 왠지 그는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우버가 없는 지역이라 갑자기 어떡해야 하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일찍 일어나서 1층의 난리를 대충 치우고 있던 엠마뉴엘이 계단 아래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춥다물, 애들은 아직 일어나지 못할 거야. 내가 데려다줄게."

    "괜찮으시겠어요? 그렇게 해주신다면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그때 토마가 방문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내밀었다.

    "아 미안해. 알람을 맞춰 놨는데 일어나지 못했어. 금방 준비할게."

    "토마, 더 자. 엠마뉴엘이 태워 준대."

    "아빠가 일어났어? 대단한데?"

아래층에서 엠마뉴엘이 소리친다.

    "나는 슈퍼 아빠야. 제일 먼저 일어났지. 어린이들은 더 자도록 해."

토마는 머리를 글적이며 미안해했다.

    "잘 돌아가 춥다물, 아마 줄리랑 티보는 오전 중에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일어나면 줄리한테 너 잘 갔다고 전해 줄게."

    "고마워 토마. 잘 지내."

 

 혼자 일어나 집을 정리하던 엠마뉴엘의 차를 타고 집을 나섰다. 크고 긴 파티 후에 아무도 일어나지 못했기에 방마다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했던 내 지난밤 부탁은 이행할 수 없었다. 그것도 아쉬웠지만 무엇보다 아늑하고 멋진 방을 내어준 비올랫에게 큰 포옹을 해 주지 못한 것, 초대해 줘서 고맙다고, 결혼 정말 축하한다고 줄리와 티보, 발레리한테 떠나기 전 인사 못한 것이 제일 마음이 쓰였다. 조금 피곤한 옆모습으로 운전하는 엠마뉴엘은 걔네들은 네가 와준 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워하고 있다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걱정 말라고 말하며 기차역으로 향해 운전했다.

 역에 도착해서 보니 기차 시간이 20분 정도 남았다. 역시 부모님과 이동하면 무척 빨리 도착하게 된다. 나는 감사하다고 가서 조금 더 쉬라고 말했지만 엠마뉴엘은 커피를 마시자고 했다. 나는 거듭 사양하고 피곤할 것이 분명한 그를 집에 보내려고 했지만 한국인의 기질이라고 생각했던 이것은 손님을 귀하고 대접하고 싶은 만국 공통 심정이었던 것을 알게 됐다.

    "멀리서 온 너만 여기 두고 갈 순 없지. 자 저기 가서 커피 한잔 하자. 나도 한잔 마시고 싶구나."

왠지 카페의 바에 앉은 엠마뉴엘은 어제와 다르게 뭔가 기운이 빠져 보였다.

    "많이 피곤하죠? 정말 멋진 파티였어요. 그리고 줄리를 보면서 알고 있었지만, 비올렛과 토마도 정말 착하고 멋진 것 같아요. 발레리와 엠마뉴엘이 정말 좋은 부모님인 거겠죠?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다 잘 자라서 대견하고 스스로가 뿌듯하시겠어요."

    "우리 아이들은 정말 착해. 좋은 아이들이야. 근데 아이들이 많은 게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아."

    "왜 그렇죠?"

    "다들 떠나가니까."

갑자기 엠마뉴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나는 너무 깜짝 놀라 커피를 홀짝인 후 목을 가다듬었다.

    "흠. 엠마뉴엘 괜찮아요?"

엠마뉴엘이  먼 곳을 바라보다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쎄 비앙(괜찮아)."

    "그런 것 같아요. 다들 멀리 떠나가고 새 가족을 만들 거지만, 제가 그들이라면 이렇게 멋진 어머니와 아버지가 항상 반겨주는 멋진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기쁠 것 같아요."

 엠마뉴엘의 눈물이 테이블로 뚝뚝 떨어진다. 릴은 프랑스의 북부의 벨기에에 접한 작은 도시이다. 그 작은 도시의 기차역의 유일한 아시아인으로 보이는 나와, 나의 동행 중년의 엠마뉴엘에게 모든 이들의 시선이 모인다. 그 일요일 아침 중년의 남성을 울린 검은 머리의 서울에서 온 여자는 양 볼에 가볍게 키스를 한 번씩하고 미련 없이 떠나간다. 그는 아침부터 눈물바람으로 한 여인을 떠나보내고 숨을 고르고, 멋진 아내와 3명의 자식과 한 명의 사위가 숙취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저택으로 다시 돌아간다. 어떤 이야기들은 이런 식으로 와전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런던으로 돌아와서 한동안 후유증을 알았다. 그것을 옷장세면대 후유증으로 부르고 있다. 그것은 옷장을 열면서 왜 내 방에는 세면대가 없는지, 왜 우리 집은 거실이 2개 이상이 아닌지 생각하며 나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옷장을 열면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 같은 꿈에서 깨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근데 이렇게 실체가 없는 괴로움은 다른 일로 금방 사라지기도 하는 게, 나는 그 사이 다시 런던의 삶을 꾸리며 쇼디치의 처음 오는 사람은 쉽게 문을 찾을 수 없는, 그라피티로 뒤덮인 문을 열면 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집의, 존재하지 않는 방으로 이사하기 위해 정신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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