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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춥다물 Nov 15. 2023

루시앙의 집 2

프랑스식 결혼식과 이불킥

Lille, France 2016


 1층에서 물만 떠와 조금만 더 자려고 했던 나는 루시앙이 온 뒤 집안 분위기가 바뀌어있는 것을 보고 주방에 자리를 잡았다. 루시앙은 식사를 할 때도 주변에 누가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하고 아무도 모르게 티슈를 건네는 사람이었다. 팔을 조금 더 편하게 먹을 수 있게 자신의 의자를 조금 더 당기기도 했다. 나는 눈으로 그 부드럽고 단호한 움직임을 계속 따라갔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대화에 끼지 못하는 것 같으면(주로 나) 지금 우리가 말한 프랑스인이 누구인지, 그 사람의 수학적 업적이 무엇인지 영어로 다시 간략하게 정리를 해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적확한 친절을 베푸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정말 황홀한 일이 아닌가. 그것을 가족들도, 가족의 여자친구, 남자친구들도 다 알고 좋아하는 듯했다. 식탁에 앉은 모든 사람이 루시앙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브누아아저씨는 계속 흐뭇한 미소로 루시앙을, 그리고 루시앙을 바라보는 사람들(주로 나)을 계속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2층/ 사진은 1층(2층 사진 없음)

 2층 계단을 올라오면 평면 오른쪽으로 내가 묵었던 제일 작은 방(bedroom4)과 첫째 루시앙과 셋째 르젠이 묵었던 방(bedroom5)이 있다. 왼쪽으로는 브누아와 미셸의 부부 방과 둘째 젠과 막내 마들렌의 방이 나온다. 바쁜 결혼식 참석 일정에 저 방들을 다 구경하진 못해서 내부는 거의 내 상상이지만 구조벽과 벽난로 기준으로 식구들이 많은 집의 방을 어떻게 배치하면 좋을지 계획(점선 벽체)해 보았다. 방이 많은 것에 비해 욕실과 화장실의 개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는데, 몇 세기전에 지어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1층과 2층이 생활공간, 취침공간으로 나뉘어 있는 것은 바로크 주거 방식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오른쪽은 남자 형제, 왼쪽은 여자 형제의 방으로 구성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위계와 남녀구분이 확실한 고적적이고 딱딱한 바로크 주거 양식에서 흔히 보는 계획이다. 이 집의 외관은 비교적 간결하고 실용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웅장하고 거친 바로크 형식을 완전히 따랐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이런 위계적인 바로크적 내부 계획은 시대를 타고 쭉 이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지내는 공간의 큰 틀은 시대를 지나도 크게 바뀌지 않는다.


 결혼식 참석 준비를 위해 우리는 각자 긴 아침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었다. 오래된 마룻바닥으로 된 이 집에는 카펫이 깔려있지 않았는데 덕분에 구두를 신고 1층으로 내려가던 나는 저 계단에서 우당탕탕 미끄러졌다. 엉덩방아를 연이어 찧으면서 계단을 다섯 칸 더 내려갔다. 아래층에서 올라오고 있던 젠이 소리를 질렀다. 멍이 들었을 것이 뻔할, 엉덩이와 접질린 것 같은 발목의 고통을 이기는 창피함이 먼저 밀려왔다.

    "악!"

제발, 조용히 해. 젠. 안타깝게도 내 마음의 소리는 젠에게 가 닿지 않았다.

    "엄마아! 아빠아! 어떡해! 춥다물이 계단에서 넘어졌어어어어."

 왼쪽에서 브누아, 미셸, 막내 마들렌, 오른쪽에서 첫째 루시앙, 셋째 르젠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1층에서는 강아지 딕시가 후다닥 뛰어올라와 아직 계단에 널브러져 있던 나를 향해 괜찮냐고 왕왕 짖는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와서 2층에서 계단 중간의 나를 내려다보고 있음을 깨닫고 재빨리 날아간 구두 한 짝을 손에 들고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섰다.

    "괜찮아, 괜찮아."

그리고 1층으로 내려갔다. 내가 왜 1층으로 내려가던 거였지 까먹었지만 상관없었다. 웅성웅성하던 2층의 사람들이 이내 왼쪽과 오른쪽으로 흩어졌다. 밑에 내려가니 1층 거실에 있던 젠의 남자친구 알렉시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무 일도 아닌 척하며 따라 내려온 강아지 딕시와 함께 아무도 없는 주방으로 갔다. 딕시가 그제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나는 딕시에게만 들리게 한국말로 말했다.      

    "딕시야. 진짜 존나 아파, 그리고 너무 창피해."

 이렇게 나는 몇백 년 동안 사람들이 드나든 고택의 마룻바닥이 얼마나 반짝반짝 미끄럽고 멍이 들게 딱딱한지 엉덩이로 배웠다. 마치 이 집의 아이들이 손과 혀로 바로크와 로코코를 배우며 자랐듯이 말이다.

아름답고 총명한 딕시

 성당에서의 아름다운 결혼식 후 저녁 시간 피로연장 도착했다. 자리가 지정되어 있는 이 피로연장 입구에서 내 테이블에는 영어를 잘했던 줄리의 친구들의 이름과, 같은 이유로 내 자리 바로 옆에 루시앙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옆의 루시앙에게 '와 우리 옆자리네' 하며 반색을 표했지만 브누아가 나를 어디선가 보고 있을 것 같아 최대한 날아오르고 싶은 기분을 숨겼다. 맞은편에 앉은 줄리의 친구 커플이 우리 앞에서 꽁냥꽁냥 키스를 나누자, 내가 이때다 싶어 물었다.

    "네 여자친구는 왜 안 왔어?"

    "응, 안나는 베를린에 일이 있어서 못 왔어."

 넋을 넣고 친절하고 멋있는 사람을 보고 있던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대답이 있으면 안 되는 질문을 한 것이었는데, 대답을 들었다. 이 대답을 기대치 못했던 나는 다른 테이블에 앉은 브누아아저씨를 바라봤다. 루시앙도 나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브누아아저씨가 우리 둘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우리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도 손을 흔들었다. 얼굴을 갸우뚱하는 루시앙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이 성대한 프랑스식 결혼식을 즐길 준비가 된 것 같았다. 그러고 나니 친절한 브누아아저씨의 얼굴이 다시 보인다. 상기된 얼굴의 줄리와 조금 긴장한 티보의 얼굴도 완전히 다시 볼 수 있게 됐다.


 프랑스어로 진행된 사회를 틈틈이 루시앙이 통역해 주었다. 티보의 아버지의 축사에서 '춥다물 드 쎄울'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모두가 나를 쳐다보며 큰 박수를 쳐 주었다.

    "방금 '서울에서 온 춥다물에게 다시 한번 큰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라고 하셨어."

 나는 그를 향해 쌍따봉을 날렸다. 장내에는 다시 한번 박수소리가 커지고 흐뭇한 웃음이 퍼졌다. 식순이 거의 끝나고 줄리가 하얀 손수건을 허공에 돌렸다. 그러자 모두가 자신 앞에 있던 냅킨을 공중에 몇 분 간이나 원을 그리며 돌렸다. 이것은 식순이 끝나고 이제 먹고 마시고 놀자는 신호다. 화이트 와인 소스가 곁들여진 농어 요리와 버섯크림소스의 돼지고기와 오리고기 요리가 연달아 나오는 4코스로 이루어진 정통 프랑스 요리도 남김없이 다 먹고 쉴 새 없이 와인을 마시며 디저트 탑(결혼식 케이크와 갖가지 디저트가 모여있는 뷔페식 테이블)에서 갖가지 디저트를 가져와 맞봤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오렌지 크레페(크레페를 오렌지 소스에 졸인 프랑스 디저트)지 하며 두 번째 접시를 가져오면서 눈이 마주친 줄리와 윙크를 했다. 루시앙과 베를린에서 대학원 다니는 게 어떤지, 런던에서 회사 다니는 건 어떤지, 가족들이 그립지 않은지 같은 얘기들을 하다가 내 앞에 앉았던 영어를 잘하는 줄리 친구와도 재밌게 줄리의 어렸을 때 이야기를 들었다. 줄리의 어린 사촌동생들이 영어를 연습하려고 나에게 같이 춤을 추자고 달려온 것을 마다하지 않고 손을 잡고 무대로 나갔다. 그렇게 왈츠를 처음 췄다. 브누아 아저씨의 눈빛도 이제 가감 없이 친절하게만 느껴졌다. 피로연 댄스파티에서 새벽 3시까지  춤을 추던 사람들이 거의 돌아가고 나는 브누아 아저씨의 차를 타고 지친 마들렌, 젠, 알렉시와 함께 집으로 왔다. 나는 성대한 프랑스식 결혼식과 피로연을 행복하게 참석하고, 정말 '웃겨 정말' 할 때 그 '정말'이 된 내가 너무 웃겨서 이불속에서도 킥을 서너 번 하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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