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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Sep 05. 2022

펑크 난 자동차를 끌고 모스크바로

D+44, 모스크바

모스크바로 가는 길, 갑자기 주행 중 경고등이 켜졌다. 타이어 압력에 이상이 생겼다는 표시. 급히 대로변에 차를 세우고 타이어를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다.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있나. 일단 급한대로 비상용 에어 펌프로 공기압을 채우고, 50km/h 정도의 저속 주행으로 갈 수밖에. 마음 한켠에 불안을 이고 느릿느릿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급히 차를 세운 곳의 풍경도 이렇게 아름다울 일인지.


세계 4번째 대도시인 모스크바는 역시나 복잡하고 교통체증이 심했다. 길 곳곳엔 여행자로 보이는 이들이 바글댔다. 도시 진입 후 30km를 지나오는데 1시간이 걸렸다. 이정도면 서울의 교통체증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번화한 곳 중 하나인 아르바트 거리 근처에 호스텔을 잡았는데, 덕분에 좁고 번잡한 골목길을 뚫고 들어오느라 꽤 진을 뺐다.


모스크바 시내. 러시아를 달리던 중 갑자기 날아온 불상의 물체에 맞아 차 유리에도 긴 금이 생겼다.

이제까지 주행거리는 10,000km쯤 된다. 원래 도착하기로 계획했던 날보다 좀 늦긴 했지만. 전체 여정을 20,000km로 생각하면 거리 상으로는 딱 절반에 이르렀다. (이때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나는 결국 35,000km를 여행하고서야 집에 갈 수 있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날을 오랫동안 기다렸다. 조금은 외로웠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이르쿠츠크를 제외하면 러시아 대부분의 도시는 여행자가 많지 않다. 현지인들과 스킨십을 기대했지만 언어와 안전의 문제로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스스로도 도로 위를 달리는 감각에 중독되기도 해서, 언젠가부턴 그저 달려오기만 했던 것 같다. 중간에 들렀던 크라스노야르스크, 노보시비르스크, 예카테린부르크 같은 대도시에서도 휴식을 취했을뿐 도시를 둘러보진 않았다. 그러다보니 모스크바에선 한국인이든 타국 출신의 여행자든, 대화다운 대화를 해볼 수 있겠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르바트의 밤거리


아울러 여행 중에 마음 한켠에 자리했던 모종의 부담감을 내려놓고 싶었다. 나는 자유롭고 싶어 여행을 떠나왔다. 언제든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가 있다. 나야 비행기를 타면 금방 돌아갈 수 있지만 차는 방법이 없다.


자동차를 한국으로 돌려 보내려면 (알려진 바로는) 블라디보스토크 아니면 스페인에서 배에 태우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뒤로 돌아갈 순 없으니 직진만 남은 나에게 시베리아는 너무 넓고 때로는 막막하게 느껴졌다. 횡단을 중간에 포기한 여행자들은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차를 태워 유럽까지 보내기도 한다는데,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여기서도 뭔가에 묶여 있다는 느낌을 벗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부턴 다르다. 모스크바에서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직진하면 3,600km. 대략 1주일이면 넉넉하게 갈 수 있는 거리다. 즉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10일 후엔 집에 갈 수 있다는 뜻이다. 우습지만 조금 홀가분해진 느낌이 들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다음날 밝은 데서 타이어를 살펴보니 작은 나사못이 박혀 있었다. 서비스센터에 가야 할까, 고민하다 돌연 직접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몽니를 부렸다. 차에 있는 공구들로 못을 빼내고, 그 자리를 고무 지렁이로 메꿨다. 남들은 우습겠지만 나로서는 처음 해보는 일이라 땀을 뻘뻘 흘렸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어쨌든 잘 마무리됐다. 할 줄 아는 것이 또 하나 늘었다.



나는 이른바 '먹물'이라 공구를 다루는 일엔 영 서투르다. 그러나 먼 어딘가가 아니라 눈 앞의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리고 내 차 정도는 내가 고칠 줄 (또는 뭐가 문제인지라도) 알고 싶어 이것 저것 배우는 중이다. 그 과정이 꽤나 마음에 든다.


나사못은 버렸다. 이녀석도 제자리에 알맞게 조립되어 있었다면 내 차에 박힐 일이 없었을 텐데. 미움받거나 뽑혀나가지 않아도 괜찮았을텐데. 제자리를 찾는 일은 나사못에게도 어렵지만 사람에게도 참 어려운 일이다. 하찮은 인간이 되지 않기, 뽑혀나가고 버려지는 일이 없기, 뭐 그런 것들. 내 자리는 어디인지 긴 시간 고민하고 있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호카곶에 당도하는 날이면 알게 되려나.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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