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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Sep 07. 2022

모스크바와 다국적 연애편지

D+48, 여전히 모스크바

원래는 호스텔 근처 바에서 보드카를 마시며 적당히 하루를 정리하려 했다. 마시긴 꽤 마셨는데 영 부족했다. 차 트렁크 아이스박스에 쟁여둔 보드카 중 하나를 대중 없이 고르고, 안주로 먹을 김도 몇 봉지 챙겼다. 호스텔 계단을 올라가는데 문득 안에서 술을 마셔도 되는지 자신이 없었다. 커피를 담아 마시던 텀블러에 보드카를 담으니 한 병이 딱 맞았다.



호스텔 부엌에는 공용 식사 공간이 있었는데, 이미 5~6명 정도가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중간중간 대화를 주워듣기도 했지만 대부분 러시아어를 쓰는 바람에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몇 마디 없었다. 한편에 앉아 핸드폰을 하며 보드카를 홀짝이고 있었는데 사람 좋아 보이는 한 아저씨가 내게 물었다.


"저기, 너는 뭘 마시는 거야?"

"이건 보드카야"

"에이, 농담하지 마"


그는 연신 손사래를 치며 내 말을 믿지 않다가, (내게 양해를 구하고) 텀블러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이건 진짜 보드카야!"라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자신을 제냐라고 소개한 그는 "Strong guy from Korea"라고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았고 그때부터 작은 파티가 시작됐다. 우리는 저마다 쟁여둔 안주와 술을 가져와 긴 수다를 떨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린 멸치와 고추장의 조합을 소개해줬는데, 잠깐 찍어 먹어보고는 매워하는 그들을 보며 한참을 웃었다.


모스크바에서는 낯선 이들을 많이 만났다.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낸 건 앞서 말한 파티에서 친해진 제냐(앞서 말한 제냐와는 동명이인이다)와 안젤라. 이들은 러시아의 조그마한 시골마을 출신인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4년 간 살다가 모스크바로 이사하려고 집을 구하느라 호스텔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둘은 나와 나이가 비슷하다.


제냐는 내게 모스크바의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줬다. 나는 그와 함께 붉은 광장과 바실리 성당 등 시내를 돌아다녔다. 하루는 점심쯤 느지막이 일어나 "너무 피곤하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할 거야!"라고 의기투합하고는 함께 음식을 해 먹으며 거의 하루 종일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러시아와 한국의 문화, 역사, 정치, 경제적 삶 같은 것들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위안부·강제징용이나 구 소련 연방의 문제들, 현재 정치 상황이나 청년의 삶에 대해서. 이때는 영화 기생충이 개봉하기 전인데, 그는 한국에 사람이 반지하에 산다는 것에 놀랐고, 나는 러시아에는 반지하 주택이 없다는 것에 놀랐다.



제냐와 안젤라는 나보다 하루 먼저 떠났다. 다행히도 나쁘지 않은 집을 구해서 이사 준비를 하러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다고 했다. 우리는 여느 여행자들처럼 "모스크바에서, 또는 한국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러고 난 뒤에는 혼자 도시를 돌아다녔다. 아르바트 거리 어디쯤이었나,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듣는데 빨간 점퍼를 입은 웬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그의 이름은 유라. 우크라이나에서 왔다고 했다. 그는 영어를 전혀 못했지만 나에게 담배를 한대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내가 그에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네자 그는 '러시아 와인'이라며 자신이 마시던 팩 와인을 내게 나눠줬다.


물물교환을 매개로 시작된 손짓 발짓의 대화. 유라는 알고 보니 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노숙인이었고 담배가 필요해 내게 말을 건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 여행을 꽤 재밌어했고, 내게 러시아에서 꼭 먹어봐야 하는 것들을 하나씩 알려줬다. 또 자신의 고국인 우크라이나엔 아름다운 곳이 많다며 꼭 가보라고 열을 다해 말했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절반에 그쳤지만 그의 열성이 좋아 나는 가끔씩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담배 한 갑과 와인 한 팩을 비웠을 때 그는 잘 곳이 없다며 내게 돈을 달라고 부탁했다.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나는 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실제로 수중에 현금이 얼마 없기도 했고, 건네주고 나면 이 대화를 씁쓸하게 기억하게 될까 봐. 아쉬운 표정이 스쳤지만 그는 활짝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는 내 휴대전화를 빌려가더니 음성 번역기에 대고 '친구'라고 말했다. 우리는 포옹을 하고 서로의 안녕을 빌며 헤어졌다.



모스크바에서의 마지막 밤은 연애편지를 위해 썼다. 그날 호스텔 파티의 주인공은 인도에서 온 동갑내기 남자 삼시르였다. 그는 같은 호스텔의 어떤 여성과 친해졌고 호감이 생겼는데, 마음을 적절히 전할 방도를 몰라 고민 중이라고 했다. 너무 직진하면 무례하다고 느낄까 봐, 그러나 망설이다 떠나고 나면 후회할까 봐. 이에 부엌에 있던 모두가 의기투합해 그의 연애상담을 해줬다. 인도, 한국, 체코, 스페인, 러시아에서 온 남녀노소가 모여 한 장의 연애편지를 썼다.


저마다 문화가 다르니 한 단어를 넣는데도 우리는 옥신각신했다. 스페인에서 온 남자가 이 문장을 제안하면 내가 그건 너무 많이 나갔다고 제지하고, 내가 다른 문장을 제안하면 체코에서 온 부부가 동유럽권에서는 이렇게 표현해야 먹힌다고 고쳐주는 식. 그렇게 다섯 개 나라의 연애 클리셰가 뒤죽박죽 섞인 짧은 편지가 완성됐다. 삼시르는 신난 표정으로 다음날 꼭 편지와 함께 마음을 전하겠다고 공언했다.




다음날 내가 부엌으로 나왔을 때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편지의 수신인은 공교롭게도 당일 아침 떠났고, 삼시르는 떠나는 그에게 허둥지둥 편지와 함께 자신의 연락처만 적어 건넸다고 했다. 편지의 답신을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여행자의 인연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으니 그게 마지막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결과와 상관없이 편지를 쓰기 위해 쑥덕댔던 우리의 밤이 내게는 충분히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다.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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