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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Sep 08. 2022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밤

D+53, 상트페테르부르크

41일, 10,771km. 러시아에서 보낸 시간과 공간들이다. 숙취를 가득 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그날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보낸 마지막 밤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항구에서 차를 받고 거리로 나섰을 땐 난생처음 롤러코스터를 타는 아이처럼 운전대를 꽉 붙잡았다. 하바롭스크를 지나는 길에 알렉산드리치를 만나 와일드 캠핑을 하고 마피아의 (서류상) 형제도 되어보았다. 바이칼에서는 호수 속을 걸어도 보고, 끔찍한 폭우에 차가 두 번이나 진창에 빠진 일도 있었다. 모닥불 앞에 앉아 엄마와 긴 매듭을 풀기도 하고. 사랑하는 동생을 보내주느라 차 안에서 엉엉 울어야 했던 날도 있었다.


그때는 당연했던, 지금은 그리운 러시아의 풍경들


어느 날에는 쏟아지는 별빛을 보며 잠들었다. 또 다른 날에는 안개 낀 숲 사이를 엉금엉금 빠져나가야 했다. 모스크바에서는 혼자 펑크 난 타이어를 고치고, 노숙인과 술을 마시고. 제냐와 안젤라, 삼시르라는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그리고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러시아라고 하면 다들 억세고 거친 무언가를 떠올린다. 위험하고 전체주의 전통이 남아 있는, 폐쇄적이고 무례한 사람들의 나라 따위로 여겨진다. 내가 러시아에 오기 전 약간의 걱정과 함께 들은 말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직접 만난 러시아는 많이 달랐다. 한국에서도 당연히 지켜야 하는 안전수칙 같은 것들만 지키면 위험하지 않았다. 경찰과 군인이 곳곳에 있어 사람 사는 곳에서의 치안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나았다. 맥도날드와 스타벅스, KFC를 곳곳에서 볼 수 있으며(제냐는 '러시아에도 맥도날드와 스타벅스가 있다'라고 꼭 써달라고 했다) 동부는 아시아권, 서부는 유럽·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언제든 내가 도움을 요청하면 발 벗고 나서서 거들어줬고, 서구의 시민성에 대한 신화적 믿음을 걷어낸다면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문화적 진단은 항상 문화적 편견을 동반하고, 나는 러시아에 가해진 진단들이 상당 부분 짙은 편견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서유럽을 여행할 때 몇 번이고 느꼈던 모욕감과 차별감을 러시아에선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어디서든 나만의 작은 숲을 발견할 수 있었다.

꽤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 시베리아의 너무 넓은 대자연과 시야를 가득 채웠던 하늘. 바이칼 호수에서 보낸 마법 같은 시간들. 그리고 나의 러시아 친구들인 제냐와 안젤라 그리고 알렉산드리치. 원래는 '뚫을' 생각으로 임했던, 단순히 횡단길의 도로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시베리아. 그 안에 너무 많은 게 담겨 있었다. 덕분에 원래 3~4주 안에 통과하려던 러시아에 5주 넘게 체류해버렸다. 당연히 전혀 아쉽지도 아깝지도 않다. 이러려고 온 여행인걸.


가장 많이 걱정했던 러시아 구간을 무사통과했다. 무진장 길었지만, 그 길었던 길만큼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을 가득 담고 간다. 이제 내일이면 육로로 국경을 넘어 핀란드로 넘어간다. 유럽 구간의 시작이다.


조심이와 한 컷


P.S. 러시아 정부가 옆 나라를 침공해 시민들을 살해하는 지금, 내가 만났던 러시아의 단면이 틀렸던 것은 아닌지 고심한다. 그때의 기억을 더는 그것 그대로 향유할 수 없어 슬프다. 그러나 내가 당시 만났던 러시아를, 그때의 심정으로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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