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54, 핀란드 하미나
아침 일찍 일어나 입국 심사를 위해 짐을 정리했다. 그간 러시아에서 캠핑을 하느라 잔뜩 뒤섞인 짐들을 깔끔히 정리하니 출발할 때보다 짐의 양이 눈에 띄게 줄었다. 이것저것 먹어 치운 탓이겠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데카트론(유럽의 아웃도어 용품점)에서 연료와 이것저것 캠핑 용품을 사려고 했지만 도로에 차가 너무 많아서 포기하고 바로 국경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자잘한 접촉 사고라도 한국보다 리스크가 크니 운전을 더 조심히 하게 된다.
2시간 여를 달려 핀란드 발리마(Vaalimaa) 국경에 도착했다. 육로로 국경을 넘는 것은 처음이라 무척이나 긴장했다. 어제 자기 전 대략적인 입국 방법을 복습했는데도 꽤 떨렸다.
육로로 국경을 넘는 방식은 대략 이렇다. 우선 대기선에 차를 대고 기다리는데, EU 소속국 차량과 그렇지 않은 차량은 줄이 달라 잘 서야 한다. 자기 차례가 되면 차량 등록증 등 관련 서류를 제출한다. 나는 국문/영문 차량등록증과 함께 일시 수출입 서류를 제출했는데, 세관원은 처음 보는 서류인 듯 즐거워했다. 통과하고 나면 줄에 차를 대고 잠깐 나가 출국 심사를 받는다. 공항에서 하는 그것과 똑같다. 나를 별로 닮지 않은 여권 속 사진과 나를 비교한 출입국사무소 직원은 한참 나를 들여다보고 나서야 여권에 도장을 찍어 줬다. 차량으로 국경을 넘으면 도장에 자동차 표시가 찍히는데 무척이나 귀여웠다.
이후에는 차량 세관 검사를 받아야 한다. 대체로 육안으로 짐을 뒤적이면서 검사하는데, 의심 가는 정황이 있으면 엑스레이 검사를 받아야 한다. 마약견도 함께 동행해 마약이 있지는 않은지 냄새를 맡아본다. 다행히 나는 육안 검사만 하고 별문제 없이 통과할 수 있었는데, 보통 한국에서 가져온 가루약이나 술들이 문제가 된다고 한다(러시아 보드카를 모두 먹어치워서 다행이다). 여기까지 하면 러시아에서의 절차는 끝.
그러고 나면 핀란드를 향해 약 3km 정도 국경 지대를 지난다. 중간에 면세점도 들를 수 있는데 규모가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이후 핀란드 국경 검문소에서 다시 유사한 절차를 거쳤다. 러시아에서 1시간, 핀란드에서 1시간 30분가량 걸린 것 같다. 다른 여행자들보다는 적게 걸린 편인 듯하다. 아침 일찍, 또는 금토일에 국경을 통과하면 더 오래 걸린다고 들었다.
국경 사무소에서는 유럽 통합 차량 보험인 그린카드도 가입했다. 4개월에 대략 50만원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책임보험이다. 다들 들어야 한다, 필요 없다 말이 많은데 이 보험 없이는 입국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기 때문에 고민 말고 가입하는 게 좋다. 인터넷을 통해 가입하면 좀 더 싸다고 하던데, 깐깐한 검문소에서 혹여 문제 삼으면 많이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으니 나는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
어찌 됐든 이제 드디어 북유럽이다! 핀란드를 지나 유라시아 대륙의 북단, 노르웨이의 노르카프(Northcape)까지 올라가 볼 계획이다. 국경심사까지 통과하고 나니 긴장도 풀리고 새삼 실감이 나, 차 안에서 혼자 덩실덩실 춤을 췄다. 러시아를 지나 또 다른 미지의 세계에 한 걸음 디딘 느낌.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일이 주는 약간의 두려움과 긴장은 항상 짜릿하고 설렘을 동반한다. 그리고 난 그 느낌이 무척 좋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할 때도 그러했고, 유럽 땅을, 그것도 오랫동안 그려왔던 북유럽 땅을 밟는 느낌이란. 마음이 고양감과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자동차로 국경을 넘어 여행하는 사람들을 오버랜더(Overlander)라고 부른다. 번역하자면 땅을 넘는 사람들. 또는 '선을 넘는 녀석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나는 운전석 창문 아래 'Across the universe'라는 문구를 붙여뒀다. 국경을 넘고 산과 강을 건너 전혀 새로운 문명권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 어찌 보면 새로운 우주에 당도하는 일. 그 특유의 자유로움과 정취는 다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
조금은 씁쓸한 마음도 들었다. 분단이 아니라면 우리도 자유로이 백두산을 넘어 중국과 러시아로 떠날 수 있을 텐데. 유럽 사람들은 주말이면 북유럽으로 캠핑을 가고, 러시아 사람들은 여름휴가로 벨라루스를 방문하며, 헬싱키 사람들은 에스토니아로 술을 사러 간다. 그들에게 국경을 넘나드는 일은 조금 귀찮은 일일 뿐 자연스러운 것. 분단이나 이념투쟁, 철책선 같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내심 부러웠다.
앞으로 몇 번이고 나는 이 자동차를 끌고 국경을 넘을 테다. 그때마다 찾아올 새로운 도전과 세계가 내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우리도 38선 이남에서 차를 몰고 출발해 세계를 유랑하는 날이 올 수 있기를 조심스레 바라며 노르카프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