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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Sep 14. 2022

저기, 나 오늘 하루만 더 있을게

D+60, 핀란드 레피니에미

어젯밤엔 은은하게 비가 내렸다. 빗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아, 오늘은 정말 떠나려고 했는데. 그러나 젖은 텐트를 그대로 집어넣으면 곰팡이가 생긴다는, 그래서 오늘도 떠날 수 없다는 너무나도 합리적인 핑계를 만들어내는 데 걸린 시간은 5분 남짓.


이제는 너무 길어진 머리카락을 부비며 오늘도 캠핑장 리셉션으로 향한다. 수염 덥수룩한 주인아저씨는 날 보며 말 안 해도 알겠다는 듯이 웃는다. 밤늦게 도착해서, 내일 떠날 거라고 말했던 게 며칠 전. 그 이후로 매일 아침마다 "하루 더 묵을게."라고 말하기를 4일째 반복하고 있다. 귀찮게 구는 게 미안해서, 결제를 마치곤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오늘이 진짜 마지막이야."


이름 없는 마을 근처의 조그마한 캠핑장. 헬싱키나 투르쿠 같이 핀란드의 유명한 도시는 모두 남부에 있다. 북부엔 오울루와 로바니에미 정도가 좀 알려져 있는 편이다. 나는 원래 잠만 자고 이곳을 떠나 로바니에미에 도착할 생각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이번 주 내내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


첫날 오게 된 건, 원래 가려던 캠핑장이 차량 진입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둘째 날 떠나지 않은 건, 다른 캠핑장보다 좀 싼 것 같아서. 셋째 날은, 어제 만들어둔 카레가 남았으니까. 넷째 날은, 왠지 낮잠을 자고 싶어서. 오늘은, 떠나자니 비가 와서. 그래서 그냥 머무르고 있다. 그냥 그렇게 5일째.



사소한 이유들, 같잖은 이유들로 내 떠남과 머무름을 결정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서울에서는 항상 중요한 것들의 치고 받음 속에 있었다. 주변의 모든 게 너무 중요해서, 또는 중요해 보여서 내 공간과 시간을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틈 없이 채웠다. 나는 그렇게 중요한 것들의 부피에 숨 막혀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여정에서는 나에게 중요한 게 별로 없다. 심지어 이 여행조차도. 중요한 것들이 사라지니 마음속에 빈 공간이 생긴다. 그 사이를 사소한 것들이 채운다. 야채와 소시지를 듬뿍 넣어 만든 카레라거나, 잠깐 오고 가며 풀잎에 물방울을 얹는 소나기 같은 것들. 그렇게 사소한 것들만을 재료 삼아 내리는 사소한 결정들로 내 일상이 채워진다. 숨 쉴 공간이 넉넉히 남는다.


캠핑을 하면 뭘 하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생각보다 바쁘게 흘러간다. 예를 들면 오늘은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고 숲 속을 잠깐 산책했다. 나무 사이에 빨랫줄을 메고, 텐트 위를 덮은 방수포를 꺼내어서 말리고 텐트에 스며든 물기도 닦아냈다. 간단히 씻은 후엔 점심을 차려 먹고, 설거지. 이후 벤치에 앉아 밀린 일지와 가계부를 작성하고, 여행 계획을 살피고. 중간에 빨래를 돌리고. 무민 과자를 오도독 씹어먹다 보면 저녁 어스름. 밥을 해 먹고 설거지. 다 먹고 좀 쉬다 보니 캠핑장 앞 호수가 너무 예뻐서 짐을 싸들고 잔디밭에 나가 와인 마시기. 돌아와서 씻고 잘 준비, 잠들기. 중간중간 사진도 찍고 음악도 듣고 커피도 끓여마시고 하고 나면 하루가 잘도 간다.


이런 풍경들을 보다보면 하루가 금방 간다


캠핑 중에 가장 재밌는 일은 햇살의 색깔을 구경하는 일이다. 어제는 비가 와서 구름이 가득했고 오늘 점심쯤부터 차츰 개기 시작했다. 밤에는 완전히 깨끗한 하늘.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구름은 해를 가렸다 반쯤 가렸다 내놓았다 하며 움직인다.


이로 인해 햇살은 시간에 따라 다른 각도로 숲을 비춘다. 나무나 나뭇잎, 흙바닥, 호수나 물웅덩이에 각기 다른 색을 부여한다. 숲 속에 하루정도 가만히 머무르다 보면 그 모든 색깔들을 만날 수 있다. 자작나무는 흰색도 됐다가 파란색도 됐다가 붉은색, 주황색, 노란색이 되기도 한다. 물의 색깔도 날씨와 시간에 따라 다르다. 자연의 색깔은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어떤 햇살을 받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도 그러지 않을까.



따로 루트를 정하지 않은 채 핀란드에 입국했다. 남쪽과 서쪽을 돌며 도시들을 둘러볼지, 또는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호수 지대를 천천히 올라가며 캠핑을 할지 고민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캠핑하는 쪽을 선택했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치며 도시의 피로함이 짙어진 게 컸다. 평생 도시에만 살던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니 조금 웃기지만. 게다가 도시를 둘러보는 여행은 언젠가 또 가능하겠지만, 핀란드의 초록 속에 존재하는 경험은 지금 아니면 어렵지 않을까 싶어서.


덕분에 핀란드에 입국한 이후 매일 곳곳의 호숫가에서 캠핑을 하고 있다. 핀란드의 핀란드어 명칭은 'Suomi'인데, 호수와 늪의 땅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실제로 핀란드의 동남부 주변으로 수만 개의 크고 작은 호수들이 퍼져 있다. 그리고 그 호숫가를 둘러싸고 자작나무 숲과 캠핑장이 자리한다. 운전을 하다 보면 여우와 산토끼가 깜짝 놀라 도망치고, 숲 속에서는 요정이든 마녀든 나와야 할 것 같은 풍경. 이곳에서 나는 파랑과 초록에 마음을 흠뻑 적시는 여행을 하고 있다.


핀란드에서 만난 풍경들


내일은 정말로 떠날 것이다. 뚜렷한 이유 같은 건 없다. 양파가 떨어져서, 또는 다른 풍경에 누워보고 싶어서, 그 정도겠지. 또는 내일도 나는 너무나도 사소한 문제에 발목 잡혀서 이곳에 남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야. 나는 그걸 좋아하고 있나 보다.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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