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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Sep 04. 2022

하루에 천 킬로, 시간선을 넘다

D+43, 니즈니노브고르드

캠핑을 하면 눈이 일찍 떠진다. 해가 하늘을 완전히 밝게 물들이기 전 수프를 끓여먹고 길을 나섰다. 왠지 무작정 달리고 싶었다. 한 번쯤은 하루에 천 킬로미터 넘게 주행해보고 싶었는데 오늘 해봐야지 싶었다. 무작정 내비게이션에 먼 도시를 목적지로 정하고 출발했다. 15시간의 주행 끝에 1,119 킬로미터를 달려 저녁 즈음 예카테린부르크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가 400 킬로미터 정도 되니, 서울에서 갑자기 부산의 회를 먹고 싶다는 애인의 말을 듣고 심부름을 다녀온 셈 치면 거리가 맞다.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오래 운전을 한 것은 처음이라 다리는 저리고 엉덩이는 아프고 눈은 따가웠다. 워낙 먼 거리를 여행하니 날씨도 중간중간 계속 바뀌었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도 서울과 부산의 날씨는 자주 다르지 않나.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이날 하루만 짙은 먹구름이 비를 뿌리는 지역을 세 번 넘었다. 구름보다 빠르게 달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차의 상태는 점점...


중간에 정말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을 통과해야 했는데, 와이퍼를 최고 속력으로 설정해도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중간중간 공사 중인 구간도 많아서 흙탕물을 해치며 가느라 진이 다 빠졌다. 꾸역꾸역 우천 구간을 통과하니 비가 그쳤다. 그때 사이드미러로 선명한 무지개가 보였다. 한 줄도 아닌, 두 줄의 쌍무지개. 사이드미러 밑단으로는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음'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시베리아가 "고생했다"며 토닥거리는 듯했다.



여행 중 하루에 1천 킬로미터를 넘게 운전한 건 두 번이다. 한 번은 예카테린부르크로 가던 날. 또 한 번은 그로부터 며칠 후 예카테린부르크를 떠나 니즈니노브고르드로 가는 길. 이날은 사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얼마나 갈까 고민하다, 일단 먼 도시를 찍고 되는대로 가보지 뭐! 싶은 마음으로 경로를 설정했을 뿐이다. 멍을 때리다 보니 대충 찍었던 그 '먼 도시'에 의도치 않게 도착해버렸다.


이렇게 긴 거리를 육로로 가면 재밌는 일이 생긴다. 나는 이날만 시차를 두 번 넘었다. 서쪽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선을 넘을 때마다 시간이 한 시간씩 뒤로 물러섰다. 분명 방금까지 오후 4시 36분이었는데, 시간선을 넘자 오후 3시 36분이 된 것. 한국에서는 할 수 없는 경험이라 무척이나 신기했다. 버스나 기차가 아닌 내 손으로 운전을 해 시간선을 넘으니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시간여행자가 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럼 시간선을 지그재그로 교차하면 어떻게 될까. 러시아의 정식 명칭은 사실 러시아 연방(Russian Federation)으로 여러 개의 주와 자치공화국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어찌 됐든 같은 공화국이나 주끼리는 같은 시간을 쓰게 된다. 문제는 오늘 구글 내비게이션이 서로 다른 시간을 쓰는 타타르스탄 공화국과 우드무르트 공화국의 경계를 왔다 갔다 교차하며 가는 경로를 안내했다는 것. 결국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시간선을 넘나들어야 했다. 별안간 한 시간이 지나고, 조금 가면 다시 돌아오고, 곧 또다시 한 시간이 지나는 일을 다여섯번 반복했다. 시간 감각이 뒤엉켰다. 시간이란 정말 인간끼리 정해둔 약속에 불과한 게 아닌지.


러시아를 운전하다 보면 이런 하늘을 꽤 자주 만난다.

그렇게 시간선과 비구름을 넘어 니즈니노브고르드에 도착했다. 이제 모스크바까지 400km 밖에 안 남았다. 그러고 나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800km, 거기서 헬싱키까지 300km를 가고 나면 러시아도 끝이다. 지겨웠던 이 끝없는 도로가 왠지 가끔은 그리울 것 같아, 시원섭섭한 마음에 러시아의 도로를 두 눈 가득히 담고 있다.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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