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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Sep 03. 2022

시베리아의 하늘은 매일 다른 색깔

D+37 노보시비르스크

우여곡절 끝에 이르쿠츠크를 벗어나 계속 서쪽으로 가고 있다. 툴룬 인근에는 지난 물난리의 흔적이 곳곳에 가득했다. 나무가 쓰러져 도로를 막고 있는 경우도 많았고, 곳곳에 흙이 쏟아져내린 구간이 많아 조심히 피해가야 하는 일도 빈번했다. 길 옆으로 보이는 마을은 아직 물이 빠지지 않은 건지 곳곳에 큰 웅덩이도 보였다.


이르쿠츠크를 떠나 니즈네우딘스크까지 518km. 다음날은 크라스노야르까지 543km. 그다음 날은 케메로보까지 534km, 노보시비르스크까지 261km, 그곳을 떠나 또 603km. 처음엔 하루에 300km를 달리는 것도 힘들었지만 점점 적응이 되어간다. 출발할 때야 다소 힘들고 막막하지만 음악을 듣는다든지, 여행 이전과 이후에 대해 생각한다든지,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 잠깐 내려 주변을 구경한다든지 하다 보면 어느새 거리가 100~200km밖에 안 남아있다. 그걸 보고는 "거의 다 왔네!" 하며 기분 좋아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는 조금 우스울 때도 있다. 한국에서는 "이만큼이나 더 가야 한다니" 따위의 푸념이 나오는 꽤나 부담스러운 숫자였는데. 거리와 시간은 역시 상대적인 거다.


이정도 남으면 정말 다 왔다는 생각이 든다

말 그대로 하루 종일 운전을 한다. 낯선 도시의 숙소에 도착하면 저녁을 먹고 여행 경로를 검토하거나 여행기를 쓰고 잠에 든다. 다음날 일어나 또 수백 킬로미터를 간다. 하루 중 보내는 시간의 절반은 도로, 시야의 절반은 하늘인 나날들. 양옆으로는 초록색 숲과 넓은 평야가 펼쳐지고 차창의 전부를 하늘빛과 초록빛이 채운다.


여행을 떠나기 전 '하루 종일 운전을 하면 지루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을 한 적이 있다. 전혀 지루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다. 엉덩이도 쑤시고 가끔은 졸릴 때도 있다. 그러나 나는 지루할 정도로 시베리아에 푹 담가지고 싶었다. 시베리아의 풍광이, 드넓은 평야와 삐죽삐죽 뻗은 하얀 자작나무가, 소실점에 위치한 하늘과 나 혼자 달리는 끝없는 도로가 꼭 지루하게 느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는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가득 보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이 풍경을, 차의 진동을. 차창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바람의 온도를 여행이 끝난 후에도 잊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한때는 세상에 새로울 게 더 이상 없으리라는 생각을 했던 때도 있었다. 자만이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웠다. 무엇을 해도 크게 달라질 게 없으리라는 생각. 다른 가능성의 존재를 마음대로 소거한 뒤 '지금, 여기'에 만족하는 게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흰색과 검은색, 붉은색과 푸른색 중 어딘가 하나에 속하기를 강요받기도 했다. 적군의 존재가 아군을 만들고, 그 아군이 나의 가장 강력한 존재 기반이 된다면 그런 식으로 세계를 대결의 장으로 인식하는 게 통상적인 일이다. 그곳에서는 그랬다.


그러나 하루 종일 차창을 통해 시베리아의 하늘을 마주하며 여행하다 보면 꼭 그럴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같은 하루 중에도 시베리아의 하늘은 여러 번 모습을 바꾼다. 점심엔 새파랗다가 늦은 오후에는 큰 구름이 끼고, 해 질 녘엔 구름을 타고 노을빛이 번진다. 서쪽으로 계속 가다 보니 뒤쪽은 이미 거뭇거뭇해 밤이 됐는데, 앞쪽엔 초저녁의 밝은 하늘이 남아 앞유리와 백미러에 비친 하늘이 전혀 다른 시간대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양이 모양의 구름도 있다


크라스노야르스크를 떠나 케메로보라는 작은 시골마을로 가는 길에는 새로운 색깔의 하늘을 만났다. 정면엔 구름 없는 하늘에 초승달이 홀로 떠 있었고, 오른편엔 해가 구름 뒤에 숨어 바다 밑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늘은 연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초저녁 산길을 타고 안개가 자욱이 끼면서 환상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차를 세우고 연신 셔터를 눌렀다. 하늘은 파란색과 붉은색만 있는 건 아니었구나.


모든 것을 꼭 명명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빨간색도 파란색도 아닌 중간 어디쯤의 이름 없는 색깔도 충분히 괜찮은 것처럼.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딘가에 있거나, 무언가를 하거나, 누군가가 되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하다 마음의 소란이 잠재워지지 않으면 차를 몰고 아무 숲이나 찾아 들어갔다. 나무가 있어 차를 숨길 수 있고, 곰도 나오지 않을 적당한 장소를 찾아 캠핑을 했다. 고요한 가운데 밤에는 별과 모닥불, 저 멀리 보이는 차량의 헤드라이트만 조금씩 반짝이는 곳. 이름 난 관광지는 아니지만 내겐 가장 완벽한 공간이었다. 내 지도에는 그렇게 지구의 가로선과 세로 선상 어디쯤인지만 적혀있는, 이름 없는 나만의 숲이 하나씩 늘어갔다.


옴스크 인근 숲속에서 만난 작은 숲, 그날 쏟아지던 별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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