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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Aug 31. 2022

뜻밖의 홍수로 이르쿠츠크에 갇히다

D+33, 이르쿠츠크

엄마와 헤어진 다음날, 이르쿠츠크의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나갈 채비를 하는데 직원이 불러 말을 걸었다.


"다음 행선지는 어디니?"

"나는 계속 서쪽으로 가고 있어. 따지자면 크라스노야르스크쯤?"

"음… 안될 것 같은데. 가는 길에 툴룬이라는 곳이 있어. 거기 지금 도시 전체가 침수됐어."


당시 툴룬이 침수됐던 모습. (출처: Global News 유튜브 채널)


그는 내게 TV를 켜고 뉴스를 보여줬다. 러시아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대충 툴룬에서 홍수가 나서 몇 명이 사망했고 집 몇 채가 침수됐다는 얘기였다. 수위가 11m라고 한다. 직원은 고속도로까지 침수돼 언제 통행이 재개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호텔 앞도 물이 꽤 차 있었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어쩐지 어젯밤 호텔에 들어오는 길도 온통 물바다 더라니. 툴룬을 피하면 몽골로 내려가야 는데 그러면 경로가 너무 틀어진다. 그렇다고 홍수가 난 곳을 뚫고 갈 수는 없었다. 수해는 바이칼에서 겪은 것으로 이미 충분했다. 도리가 없었다. 이르쿠츠크면 꽤 큰 도시니, 숙박을 연장하고 여기서 며칠 머무르며 바이칼에 차를 정비하기로 했다.


전화로도 인터넷으로도 예약할 수가 없어 근처의 현대자동차 서비스센터를 직접 찾아가 예약을 한 뒤 다음날 약속한 시간에 맞춰 다시 방문했다.


이르쿠츠크 현대자동차 서비스센터

정비사는 내 차를 보더니 어딜 갔다 왔냐고 물었다. "바이칼에 다녀왔어"라고 답하니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음을 지었다. 엔진오일 교체, 브레이크 패드 점검 등 기본적인 정비는 되지만 파손된 언더커버는 부품이 없어 교체가 불가능하다며, 모스크바는 가야 부품이 있을 거라고 했다.


협의 끝에 찢어져 달랑거리는 언더커버는 떼어내기로 했다. 언더커버가 없어도 별 문제없냐는 나의 질문에 정비사는 "아스팔트로 다니면 되잖아. 별 문제없어"라고 답했다. 사실 내가 오프로드를 가려고 간 건 아니긴 한데 말이지. 조금 억울했지만 불평해도 방법은 없었다.


깨진 언더커버와 엉망이 된 차량 하부


다행히 차에 큰 문제는 없었다. 엔진오일 교체에 많은 돈이 들지도 않았다. 각종 소모품도 모두 구비돼있어 벌레 사체가 가득 들어찬 필터를 교체하고 라디에이터 그릴도 청소했다. 여행을 함께할 자동차로 현대를 고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품의 수급이 용이하고 서비스센터가 어디에든 있다는 것은 자동차 여행자에게 큰 장점이다.


차를 고치고 남은 비는 시간엔 이르쿠츠크를 둘러봤다.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이명을 가진 러시아 문화예술의 중심지. 이곳은 실패한 혁명가들의 도시다. 제정 러시아의 한계를 체감한 청년 장교들은 1825년 12월 러시아 최초의 근대식 혁명을 일으키지만 처참하게 실패한다. 결행일에 지도자 트루베츠코이가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혁명세력은 모두 붙잡힌다. 데카브리스트라고 이름 붙여진 이 청년 장교들이 유형을 살았던 곳이 이르쿠츠크다. 이후 볼셰비키를 포함해 수많은 러시아의 귀족, 지식인, 예술가들과 그 가족들이 유배 오면서 이곳은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성장한다.

데카브리스트들이 유배됐던 저택. 꽤 호화롭다.

역사는 이렇게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 의외의 결실을 낳는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모스크바에 도착해있어야 할 나의 여행도 이런저런 변수로 인해 아직 목표했던 거리의 절반밖에 오지 못했다. 변수에 취약한 건 자동차 여행의 숙명이다. 버스나 기차, 비행기처럼 약속된 시간표 같은 것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이 뜻밖의 지연이 나에게 선물을 가져다주기를 바랄 수밖에.


다행히 툴룬을 지나는 도로가 천천히 복구돼 내일 아침부터 차량 통행이 재개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긴 머무름을 마치고 다시 전진이다.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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