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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Aug 29. 2022

흐린 날도 축복일 수 있다는 것

D+30, 바이칼 호수

날은 흐리지만 비는 그쳤다. 아침을 먹고 짐을 정리해 방을 나왔다. 워낙 작은 방에 풀어놓은 것도 얼마 없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르게이는 아직 자는지 나오지 않았다. 어제 밤에 헤어지며 열쇠를 방 안에 놓고 나가면 된다고 했기 때문에 작별 인사는 없이 산장을 나섰다.


처음 들어왔던 길로 다시 나가봤지만 물이 빠지지 않아 여전히 통행은 불가능했다. 어젯밤 맥주를 마시며 세르게이는 산장 뒤쪽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알려줬는데, 다만 이렇게 덧붙였다. "나갈 수는 있는데, 거기가 길은 아니야"라고.


가보니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정말 정확히, 나갈 수는 있는데 길은 아니었다. 길이라기보다는 기찻길 옆 빈 공터에 가까웠고, 500m쯤 가면 있는 굴다리를 지나면 샛길로 통하는 길이었다. 낮게 깔린 풀숲 사이사이로 진흙이 보였다. 이미 몇몇 차가 이곳을 지나간 것인지 움푹하게 패인 곳도 있었고, 무릎정도 높이로 바닥에서 솟아 있는 쇠로 된 봉 같은 것도 보였다. 아마 끊어진 표지판의 잔해인 거겠지. 딱봐도 2륜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됐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가보기로 했다. 조심조심 차를 몰았다. 이리저리 핸들을 틀며 잘 헤쳐나와 중간쯤 왔을 때. 눈 앞에 아까 봤던 쇠로 된 봉이 나타났다. 바닥의 삐뚤빼뚤한 모양새 탓에 핸들이 그 방향으로 쏠렸다. 까딱하면 밑판이 크게 다칠 것 같았다. 급하게 핸들을 틀고 엑셀을 밟았다. '턱' 소리가 나더니 차가 더 이상 앞으로 가지 않았다. 진창에 빠진 것이다.


사진 상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차 밑판이 둔덕에 걸리고 바퀴가 빠져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핸들을 이리저리 틀어도 보고, 직진과 후진을 반복해봤지만 소용 없었다. 공회전을 거듭하면 자칫 더 깊게 빠질 우려가 있었다. 차 밑에 평평한 비닐을 대보기도 했지만 소용 없었다. 트렁크에서 삽을 꺼내 땅을 팠다. 그렇게 30분쯤 팠을까, 품에 아기를 안은 러시아인 부부가 다가왔다. 자초지종을 듣더니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뾰족한 수는 없었다. 함께 차를 몇번씩 밀어보다, 부부 중 남편이 "잠깐만 기다려!"라며 굴다리 쪽으로 뛰어갔다. 5분쯤 지났을까, 그가 큰 주황색 덤프트럭과 함께 돌아왔다.


며칠 내내 내린 큰 비로 인근 기찻길에서 선로 복구 작업을 하던 차량이었다. 차에서 덩치 큰 인부 몇명이 내렸다. 그들도 우리와 같이 처음엔 함께 땅을 파보고, 여럿이 달려들어 밀어도 봤지만 소용은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덤프트럭과 내 차를 견인줄로 연결했다. 그리고는 한명이 내 차의 운전석에 타고, 서로 신호를 주고 받으며 함께 몇번씩 앞뒤로 왔다갔다 하더니, "뿌드득!" 소리와 함께 조심이가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조심이가 겨우 진창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그리고는 손짓 발짓으로 내게 오프로드에서의 운전법을 가르쳐주고, 조심이를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줬다.



인부 아저씨들은 러시아에선 자주 있는 일이라며 조심이를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주고, 어깨를 툭툭 두드린 뒤 쿨하게 떠났다. 한 아저씨는 손짓 발짓으로 내게 오프로드에서 운전하는 법을 전수해줬다. 러시아인 부부도 자기들 일인 것처럼 함께 기뻐해주고는 "행운을 빌어!"라고 말하고 그들의 길을 갔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그 낯선 곳에서 대체 언제 빠져나올 수 있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도 조심이도 진흙을 온통 뒤집어썼지만 그런 것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굴다리를 조금 지나자 조그마한 숲과 넓은 풀밭이 나왔다. 바로 앞에는 호수가 있고, 누군가가 남기고 간 장작들과 불을 피울 수 있는 터도 보였다. 그리 높지 않은 나무로 둘러싸여 남들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 호수가 우리에게 "그동안 고생했지, 자 여기서 푹 쉬면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짐을 풀고 텐트를 쳤다. 아직도 채 마르지 못해 젖어있는 텐트에서는 꿉꿉한 냄새가 났다. 그런들 어떨까. 함께 물을 덥혀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나는 호수에 들어가 몸을 씻고, 물을 길어와서 진흙 범벅이 된 조심이를 닦아줬다. 그리고는 함께 호숫가를 산책했다. 아, 이 얼마나 그리웠던 평화인지.



비는 그쳤지만 날은 흐려 하늘이 온통 회색빛이었다. 그것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는데, 차츰 멀리서부터 물안개가 끼더니 호수와 하늘의 경계가 지워졌다. 육안으로 봐도 어디서부터 호수이고 어디서부터 하늘인지 모르겠을, 그저 떠가는 낚싯배를 보고 저기까진 호수겠구나 짐작할 뿐인 풍경. 정면에 하늘이 펼쳐진 것 같은, 지구가 실수로 빙글 돌았나 싶은 비현실적인 풍경. 아마 하늘이 너무 파랗기만 했다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테다. 흐린 날에도 감사할 수 있구나.


장작을 패고 모닥불을 피웠다. 간단한 저녁거리에 와인을 마시며 엄마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밤과 함께 이야기도 깊어졌다. 사실은 오랫동안 못하던 마음 속의 이야기들. 응어리나 상처, 부모와 자식이자 두명의 서툰 인간으로서의 이야기들. 내일 기억이 안 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술을 마신 탓일까. 망각의 가능성에 기대 새벽 5시까지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놨다. 나도 엄마도.


뜻밖의 여행, 그곳에서 함께 겪었던 며칠의 고난. 진창을 빠져나오느라 기진맥진해 노곤해진 몸. 타오르는 모닥불과 끝없이 펼쳐진 호수, 굳이 서로를 구분 짓지 않는 회색빛의 하늘. 그중 무엇 덕분이라고 명확히 말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 모든 것들 덕분일지도 모른다. 영영 치유할 수 없을 것만 같던 과거의 상처를, 낯선 호숫가에서 조금은 털어놓을 수 있었던 것은. 내내 계속됐던 흐림도 이 날만은 축복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한채 호숫가를 나왔다. 비행기 시간에 맞춰 엄마를 이르쿠츠크 공항에 데려다주고 나왔다.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 여행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 사랑하는 이들 곁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 따로 혼자가 되고 싶은 마음. 익숙한 것에 대한 그리움과 새로운 것에 대한 선망 사이 갈팡질팡하는 마음들. 며칠 간 고생한 탓에 덜덜 떨리는 조심이를 몰고 허름한 호텔방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깊은 잠에 들었다.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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