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달 Aug 28. 2022

엄마와 함께 돌아온 바이칼에는
폭풍우가 쳤다

D+26, 다시 바이칼 호수로

엄마가 바이칼에 함께 왔다. 토토를 잘 보내준 뒤 몇 가지 준비물을 더 보강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엄마가 바이칼에서 며칠 같이 지내면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엄마는 젊은 시절 캠핑을 좋아했다. 하지만 엄마를 빼면 우리 가족 중 누구도 캠핑을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내가 바이칼에서의 캠핑이 얼마나 좋았는지 눈을 빛내며 이야기했던 것. 나 또한 여행하며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다고 자주 생각했었다.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았다. 단 며칠에 불과하더라도.


단 며칠에 불과하기에 준비를 소홀히 했다. 기본 중의 기본인 날씨 체크를 잊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도착하자마자 폭우가 쏟아졌다. 사정이 좋지 않은 이르쿠츠크의 도로를 도강하듯 건너는 일은 영 쉽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러시아 국도 대부분엔 가로등이 전혀 없다) 150km를 엉금엉금 기어서 왔다. 짙은 안개가 헤드라이트 불빛을 머금고 낮게 깔린 가운데 하얀 자작나무 숲 사이를 달리는 일은 꽤 환상적이었지만, 그렇더라도 현실의 공포를 잊기란 어려웠다.


귀국하기 전 머물렀던 캠핑장에 힘겹게 도착했다. 누울 자리를 찾다 차가 진창에 빠졌다. 30분가량 차를 빼려고 씨름하다, 결국 차의 모든 짐을 내리고 다른 캠퍼의 도움을 받았다. 덩치 좋은 아저씨는 차를 견인해주며 "Russia, 4WD(4륜). No 4WD, No Russia!"라고 거듭 외쳤다. 그의 도움으로 조심이는 무사히 빠져나왔고 나는 연신 스파시바를 외치며 텐트를 치고 새벽 3시에 겨우 잠들었다.


다음날부터 종일 비바람과 싸웠다. 텐트에 물이 들어오면 닦아내고. 비바람을 막기 위한 이런저런 보조물을 설치했다가 무너지고, 날아가고, 다시 설치하고 보강하고… 엄마 텐트에서 라면을 끓여 먹다 내 텐트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고 한숨 쉬고. 뭐 그런 시간들.


텐트 안에서 살아남기


주변의 캠퍼들도 하나둘씩 짐을 챙겨 떠나기 시작했다. 떠날까 고민했지만 주변에 딱히 갈 곳도 없어 일단 좀 더 버텨보기로 했다. 그렇게 하루를 꼬박 폭풍우가 몰아치는 호숫가에서 버텼다. 혼자 왔을 때는 그토록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호수가, 이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시커먼 동공으로 나를 응시하며 떠나라고 고함치는 것만 같았다.


호수에서 무거운 돌을 가져와서 텐트에 구석에 고이고 힘겹게 눈을 붙였다. 자는 내내 바람은 나를 죽일 듯이 불어닥쳤다. 밤중에 엄마 텐트가 무너졌다. 태풍처럼 몰아치는 비바람에 텐트를 정리할 수도 없어서, 엄마는 차에서 자고 나는 텐트 안에서 버텼다. 그래도 체중으로 안에서 버티니 텐트가 날아가지는 않더라.


결국 텐트가 무너졌다.
이 텐트 안에서 내가 자고 있다.


날이 밝고 바람이 잠시 잦아든 틈을 타 텐트를 정리하고, 젖어버린 물건과 몸을 차 안에 쑤셔 박고 도망 나왔다. 핸드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주변의 허름한 산장을 찾았다. 난방시설도 씻을 데도 없고, 푸세식 화장실과 허름한 야외 주방이 바깥에 있을 뿐인 조그마한 통나무집. 그러나 이토록 편안한 곳이 없었다. 모든 짐을 산장 안에 넣어두고 빗소리를 들으며 엄마와 두문불출했다.



다음날 오후가 돼서야 비가 좀 그쳤다. 식재료가 떨어져 가던 중이라 부족한 것들을 보충하기 위해 차를 몰고 어제 들어왔던 길로 나섰다. 그런데 가는 길에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흙바닥에서 흙의 비중보다 물의 비중이 점점 커지는 느낌. 저 앞쪽에 길이 있어야 할 곳에 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어, 멈춰!"

당시의 블랙박스 영상


길이 없었다. 옆의 하천이 범람해서 길까지 잡아먹어버렸다. 이게 유일한 길인데, 맙소사. 차가 도랑에 빠지면 답이 없기 때문에 폭풍 후진해서 산장으로 돌아왔다. 차는 진흙 범벅이 됐고, 우리는 졸지에 산장에 갇힌 신세가 됐다.


왼쪽이 분명 우리가 어제 들어왔던 길이다. 길은 하천이 돼 있었고, 차는 진흙 범벅이 됐다.


별 수 없이 산장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산장 주인장이 찾아왔다. 그는 "좀 어때?"라고 묻더니 자기도 갇혔다며 괜찮으면 맥주나 한잔 하자고 권했다. 그의 이름은 세르게이. 정확한 나이를 묻지는 않았지만 이혼한 아내와 사이에 10살쯤 된 딸이 있다고 했다. 그는 태어나서 동양인을 처음 봤다며 자기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랑했다. 나에게 한국말을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번역기를 통해 이것저것 묻곤 했다. 뭔가 기분이 나쁘다가도 순수한 표정에 너그러워졌다.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냈다. 순간 섬찟했다. 짧은 시간에 머릿속에 별별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총을 건넸다. 그리고는 신기하지 않냐며, 벽에다 대고 한번 쏴봐도 괜찮다고 했다. 그의 순박함에 당황스러움과 안도감이 섞인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우리는 권총을 사이에 두고 맥주와 과자, 러시아식 감자볶음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내일은 해가 뜬다고 한다. 엄마는 모레 출국이라, 내일이 함께 보낼 수 있는 마지막 하루다. 부디 하루만은 함께 호숫가에서 평화로이 캠핑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잠에 들었다.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작가의 이전글 끝이 없는 호수에서 캠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