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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Aug 27. 2022

끝이 없는 호수에서 캠핑

D+10, 바이칼 호수

알렉산드리치와 헤어진 날 저녁, 호스텔에서 만난 분으로부터 좋은 제안을 받았다. 자신과 친한 몽골 유목민들이 있는데, 그들이 머무르는 게르에 놀러 가 일주일 정도 함께 묵자는. 워낙 오지라 휴대전화도 통하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살면서 해보기 어려운 경험"이라는 설득에 조금 고민이 됐다.


그러나 쉬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울란우데까지 꽤 강행군으로 달려온 터라 바이칼 호수에서 캠핑을 하며 며칠 푹 쉬고 싶었다. 거리도 부담이었다. 몽골까지 1천 킬로미터를 가면, 다시 내 손으로 운전해서 1천 킬로미터를 돌아와야 한다. 자동차 여행은 정직하다. 누구도 나의 일을 대신해주지 않는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기차나 비행기, 자면서 갈 수 있는 버스 같은 것은 없다. 모든 길은 내가 직접 가야 하는 길이다.


바이칼로 가겠다고 얘기했다. 호숫가에서 캠핑을 하며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제안을 해주셨던 분은 분명 후회할 거라는 등의 말을 했다. 아주 귀한 경험을 놓치는 것이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러면 뭐 어떤가. '살면서 다신 못할 경험'이라는 것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살면서 꼭 모든 것을 경험할 수도, 그럴 의무도 없지 않나.


나는 어디든 갈 수 있고, 언제든 멈출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되어 자동차 여행을 떠나왔다. 내가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 아는 것은 여전히 어렵지만, 어차피 나는 어디로 가든 별 상관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충동적이고 모자란 결정을 해도 괜찮은 삶이 필요해 나는 이렇게 멀리까지 떠나온 것이다.



다음날 마트에 들러 식재료를 두둑이 챙긴 뒤 길을 떠났다. 바이칼 호수까지는 3~400 킬로미터 남짓되는 거리라 생각보다 금방 도착했다. 원래 목표로 하던 캠핑 사이트에 러시아 청춘들이 시끄럽게 음악을 틀고 놀고 있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동해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같이 배를 타고 왔던 형님한테서 연락이 왔다.


"어디냐?"

"저 지금 바이칼 호수에서 캠핑할 곳을 알아보고 있어요"

"내가 있는 데가 풍경이 죽인다! 여기로 와"


좌표를 받고 차를 몰았다. 바이칼 호수의 서남쪽 끝 지점, 만구타이(Mangutai)라는 마을 밑에 숨겨진 호숫가의 작은 자갈밭. 주로 어린아이를 데려온 가족들이 저마다 차를 대고 캠핑을 하고 있었다. 나도 되는대로 텐트를 치고, 형님과 반가운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호숫가에 친 텐트. 텐트 바로 앞이 호수였다.

멍하니 파도치는 호수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소금 없는 바다라든지 목적지 없는 여행, 기약 없는 약속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결핍과 상실에 푹 담가져 있던 오래 전의 날들을 떠올렸다. 더 이상 나를 해칠 수 없는, 이제는 초라하고 무력해진 과거의 두려움들에 대하여.


러시아에선 생선을 소금에 푹 절여 오래 보관해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먹는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와 북유럽 등 추운 곳에서 그런 식문화가 있다고 한다. 추위가 살갗까지 파고드는 삶의 여정에서 무언가를 오래 가지고 간다는 건 어떤 것일까. 짜고 쓴 소금을 가득 들이붓고 나면 오랜 후에 꺼내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게 하염없이 호수를 바라보며 3일간 머물렀다. 낯선 이들과 함께하는 호스텔보다 혼자 고요히 지낼 수 있는 캠핑이 더 편안하다. 지겨우면 그때쯤 떠나지 뭐. 떠날 날을 기약하지 않고 머물렀다. 맥주와 식재료를 넉넉히 챙겨 온 덕에 마음도 편안했다. 양파와 감자, 당근으로 가득 찬 아이스 박스에는 절인 생선도 한 움큼 들어 있었다.



낮에는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하다, 호수 안을 걸었다. 깊이 들어가면 발도 닿지 않는 곳. 수면 위로는 바람이 불고, 수면 아래로는 차가운 물과 따뜻한 물이 교차하며 흘러왔다. 발아래로는 모래가 있었는데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발을 내딛으면 바닥까지 투명히 볼 수 있었다. 나는 누군가를 생각했다. 그리고는 물이 턱 밑으로 차오를 때까지 어떤 사람을 걸었다.



저녁엔 불을 때웠다. 돌을 두르고, 숲에서 줍거나 잘라온 나무를 알맞게 부러뜨린 후 불을 지폈다. 불은 쉽게 붙지 않는다. 작은 불씨들을 모아주고, 충분한 바람을 불어넣어 잘 클 때까지 잘 돌봐주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도 불이 힘을 잃으려 하면 장작을 더 넣어주고 다시 바람을 불어주어야 한다. 누군가 불은 성실성으로 붙이는 거라고 하였는데 불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사실 그렇다. 계속 아껴주고 보살펴주어야 한다. 나는 이제 혼자서도 불을 꽤 잘 붙인다. (마 알렉산드리치 보고 있나!)



하루 종일 물을 보다, 물을 걷다, 불을 지피고 불을 바라보았다. 무엇이든 일렁거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생각이 정리된다. 시각적 자극은 정신의 상태와 깊이 연관된다고 한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가는 여행이 이전과 다른 생각을 품게 하는 것도 과학적 이유가 있다고 했다. 대개는 진화에 미처 기입되지 못한 무언가가 불러일으키는 착각이라고 한다. 일렁거리는 무언가를 보며 나는 무슨 착각을 했던 것인지.



그렇게 3일째가 되던 날, 한국의 가족에게서 연락이 왔다. 19년 동안 함께 살았던 내 동생 토토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이야기. 텐트를 정리하고 이르쿠츠크로 달려왔다. 조심이는 장기 주차로 맡겨두고 가장 빠른 밤 비행기를 탔다. 한국을 떠나올 때 토토에게 약속했다. 언제든 어디서든 돌아오겠다고. 그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지만. 여행은 잠시 멈춘다.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154km), 이르쿠츠크→서울(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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