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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Aug 26. 2022

마피아 출신 히치하이커를 만나다-2

D+8, 치타를 지나 울란우데로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다행히 우려하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치는 나에게 아침이라며 작은 초코바 같은 것을 줬다. 괜한 의심이었나. 그는 "캠핑을 한 다음날 아침에는 몸을 풀어줘야 해"라며 같이 구보를 뛰자고 했다. 우리는 누구의 군생활이 더 힘들었는지 따위 얘기를 하며 근처를 한 바퀴 달렸다.



그렇게 나는 알렉산드리치와 4일을 더 여행했다. 모고차와 치타를 거쳐 울란우데까지. 그와 함께 달린 러시아의 도로가 대략 3천 킬로미터쯤 된다. 꽤 긴 시간을 함께 여행한 사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서툰 영어와 러시아어, 한국어를 섞어가며 여러 이야기를 했다.


나와 동갑인 알렉산드리치는 꽤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군 복무 3년을 마치고 복싱 선수로 살다 두 번 감옥에 다녀왔다. 한 번은 자신을 공격하던 남자를 때려서, 또 한 번은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의 애인을 모욕한 남자를 때려서. 그는 그것들을 뉘우치고 있다. 그리고 군대에서, 감옥에서 지내던 중 그는 부모와 누나를 모두 잃었다.


러시아 마피아들과 친해진 것도 감옥에서였다. 지금은 다소 불법적인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 같았다. 나에게 정확히 말하진 않았지만 국경 지대에서 밀입국을 도와주고 돈을 받는 브로커 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여행을 자주 떠난다고 한다. 여행에 돈은 필요 없기 때문에 가방 하나만 들고 무전여행을 다닌다. 이동은 히치하이킹으로, 음식은 인스턴트 라면으로, 숙박은 숲 속에서 침낭과 비닐텐트로. 그런 대화를 하며 우리는 친구가 됐다.


이 무모한 여행의 시작점에 그는 내게 정말이지 큰 도움이 됐다. 러시아 음식을 소개해주고, 러시아의 문화나 규범 같은 것들에 대해서 알려줬다. 정비소에 들르거나 복잡한 일을 처리해야 할 땐 통역사가 되어주었다. 사실 그런 것 없이도, 혼자 가면 더디게 가는 시간이 그와 함께 있으니 훨씬 빨리 가는 듯해 동행할 이유 같은 것은 충분했다. 나는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어떻게든 되어가는 여행이나 캠핑, 삶 같은 것들에 대해.


러시아의 한 식당 앞에서

내가 운전을 하고 있으면 그는 가끔 내 카메라를 가져가서 비디오를 찍곤 했다. 시속 140으로 달리는 차 바깥으로 거침없이 카메라를 내보내어 비디오를 찍는 그… 나는 혼절할 뻔했지만, 그의 촬영 결과물을 보면 내심 미소가 지어졌다. 규칙이나 구성 같은 것 없는 영상, 차 밖으로 나가버리는 카메라가 우리의 여행을 너무나도 잘 보여준다.


우리가 함께 맥주를 마실 때 그는 나에게 한 편의 글을 써 주었다. 그가 번역기로 전해준 글의 취지는 이랬다. "이 차는 러시아 마피아의 형제의 차다. 이것을 건드리는 순간 너희는 아주 큰일(?) 날 것이다"… 그는 주차할 때 이 쪽지를 차에 올려두면 차량 강도가 절대 이 차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가. 그래, 차량 강도한테 차를 털릴 바에야 경찰에 체포되는 게 낫겠지… 경찰이 너는 러시아 마피아와 무슨 관계냐고 물으면 길에서 우연히 태워준 히치하이커가 마피아였다고 하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혼자 운전을 하던 와중에도 웃음이 났다. 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하고 재밌는 선물을 나에게 준 셈이다.

알렉산드리치와 마셨던 맥주. 그가 써준 글.


알렉산드리치와 먼 길을 함께 가며 양 떼 목장이 보이면 서서 구경하기도 하고, 멀리 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가 풍경을 구경하기도 했다. 차 안에서 뽀글이를 끓여먹는다거나 화장실을 찾지 못해 둘 다 전전긍긍했던 웃긴 기억도 있다.


울란우데에 도착해서는 하루를 머무르며 함께 도시를 구경했다.


나는 어딜 가든 구글맵의 별점과 리뷰를 확인하고 장소를 찾아가는 편이다. 그런데 그는 도시 곳곳의 안내판과 설명을 항상 유심히 읽으며 신기해했고, 또 그 길을 따라 돌아다녔다. 그와 다닐 땐 스마트폰이 필요 없다. 대략적인 지도, 거리의 이름을 보며 그는 귀신같이 길을 찾아냈다. 함께 운전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나는 내비게이션 없이는 운전을 못하는 반면 그는 언제나 도로를 기억하고 길을 가리켰다. 단순히 내가 이방인, 그가 현지인이라 발생하는 차이는 아니었다. 길을 가고 방향을 정하는 방식, 삶의 과제를 수행하는 방식의 차이였다.



옛날에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서양의 제국주의자들이 유목 생활을 하던 원주민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당신들에겐 별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느냐"며 진심으로 이상하게 여겼다는 이야기. 어쩌면 오리엔탈리즘, 어쩌면 지어낸 이야기, 어쩌면 의사소통의 착오였을지도. 그러나 나는 진짜로 별의 노랫소리가 존재하는데 문명이 우리를 퇴화시킨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별의 노랫소리를 상상하다 설레는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알게 모르게 기술은 우리가 많은 걸 잃어버리게 만든다. 멍하니 10분 이상 멈춰 생각하는 능력 같은 것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알아채기 어렵다. 슬픈 일이다.


울란우데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헤어졌다. 그는 서쪽으로, 나는 북쪽으로 가야 해서. 언젠가 서울에서, 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나자는 인사를 나누며 우리는 헤어졌다. 그는 다시 큰 가방을 메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나는 또다시 고요해진 자동차의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그와 먹던 뽀글이, 그리고 마지막 인사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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