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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Aug 24. 2022

마피아 출신 히치하이커를 만나다-1

D+5, 벨로고르스크 인근 숲 속

하바롭스크를 떠나 치타로 향했다. 구글 내비게이션에 등록하니 어김없이 나오는 메시지. "2,000km 직진"이란다. 이제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가는 길에 어디서든 머무르면 되겠지. 길을 나섰다.


치타는 시베리아 횡단 여행자들에게 악명 높은 도시이다. 직진 앞에 붙은 저 잔혹한 숫자가 이 여행의 본질이 사실은 끝없는 운전, 또 운전이라는 걸 알려주기 때문이다. 또 2천 킬로미터 떨어진 도시를 목적지로 설정할 만큼 그 사이에 머무를만한 안전한 지점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치타로 향하는 구간에서 몇몇 횡단 여행자들이 피살된 적도 있다. 이 위험하고 긴 구간을 무사통과하면 일단은 횡단 여행에 성공적으로 연착륙했다고 할 수 있겠다.


기름을 채우러 주유소에 들렀는데, 허름한 옷차림에 큰 가방을 멘 백인 남자가 나를 불러 세웠다.


"너 어디까지 가니?" 그가 서툰 영어로 물었다.

"따로 정해두진 않았는데. 나는 모스크바로 가"

"그러면 나를 태워줄 수 있어?

"어디까지?"

"어디든 상관없어. 네가 원하는 만큼"


이렇게 낯선 이와의 동행이 시작됐다. 그의 이름은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리치. 편하게 '보우와'라고 부르라고 했다. 나이는 나와 동갑. 처음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전기공으로 일한다고 했지만, 나중에 들어보니 약간은 불법적인 일을 하는 친구였다. 마피아들과 함께 일을 했던 적도 있다고. (이 얘기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알렉산드리치와 함께 찍은 사진


그는 아주 약간의 영어만 구사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대화는 번역기를 통했다. 인터넷이 안돼 번역기가 먹통이 되면 우리는 주로 무언가를 흉내 냄으로써 대화했다. 기차는 칙칙폭폭, 배는 뿌우우, 추월은 쉬융~ 같은 방식으로. 그래도 서로에 대해 꽤 많이 알아갈 수 있었다. 소음이 가득했던 그 도시에서 쏟아낸 많은 말들이 진심을 전달하는데 얼마만큼 유효했나 돌아보게 된다.


떠들며 가다 보니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어느새 벨로고르스크라는 작은 도시의 근처까지 도착했다.


"어디에 내려주면 될까?" 그에게 물었다.

"나는 근처 아무 데나 내려주면 돼"

"어디서 잘 건데?"

"텐트가 있어. 숲 속에서 캠핑하면 돼"

"캠핑할 거야? 나도 캠핑할 건데"

"그러면 같이 하자! 내가 저녁을 대접할게"


원래 하루만 동행하려 했는데, 즉석으로 함께 캠핑을 하게 됐다. 그는 러시아에서 캠핑할 때 2가지를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곰과 사람. 우리는 주변을 돌며 차와 텐트를 숨길 수 있으면서도 너무 울창하지 않아 곰이 나오지 않을 곳을 찾았다. 적당한 숲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벨로고르스크 인근의 숲 속


각자의 텐트를 깔 자리를 잡았다. 알렉산드리치는 가방에서 비닐 몇 장과 줄을 꺼내더니, 줄을 나무에 묶고 비닐과 조합해 (자세한 공정을 보지 못했다) 삼각형 텐트를 만들고 그 안에 침낭을 깔았다. 펼치면 팡! 하고 완성되는 커다란 원터치 텐트를 챙겨 온 나 스스로가 민망해질 만큼 그의 텐트는 참 간이했다. 거기서 잘 수 있냐고 물어보니, 그는 씩 웃으며 무척 튼튼하다고 답했다.


알렉산드리치는 저녁 식사를 위해 불을 피우자고 했다. 나는 가방에서 토치를 꺼내려고 했다. 그는 필요 없다고 했다.


"불 피울 도구가 있어?"

그는 "응"이라고 답하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냈다. 그리고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나무껍질을 벗겨 모으기 시작했다. 두꺼운 나뭇가지들을 올리고, 모아 온 나무껍질을 돌돌 말아 묶은 뒤 불을 붙여 그 밑에 넣었다. 그리고는 따로 구해온 긴 나뭇가지에 냄비를 걸어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은 황당한 마음으로 그의 묘기(?)를 구경했다. 그에게 텐트는 김장 비닐이었고, 불 붙일 도구는 칼과 나무껍질이었다. 그렇게 모기 수십 마리가 물어뜯는 숲 속에서 그가 빌려준 방충 모자를 쓰고, 모기가 헤엄치는 해괴한 라면을 먹었다. 건더기를 건져 먹으려다 모기가 더 많이 건져지는 것 같아서 포기했다. 우리는 발로 불을 슥슥 끄고 "내일 보자"며 각자의 텐트로 들어갔다.


문명에 익숙한 내게 그의 러시아식 캠핑은 이상하고 두려웠다. 곰이 나오면 어떻게 하냐는 물음에 알렉산드리치는 "걱정하지 말라"라고 했다. "손을 들고, 천천히 뒤로 도망치면 돼"라는 황당한 방법을 알려줬다. 곰도 곰이지만, 나는 그도 무서웠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이 사람이 밤에 나를 공격하고 내 차를 빼앗아 도망치면 어떻게 하나. 그의 입장에서는 섭섭할 수 있겠지만 내게는 당연한 물음이었다. 베개 밑에 가위를 숨겼다. 잠깐 잠들었다가도 부스럭 대는 소리에 놀라 깨며 밤을 보냈다. 그렇게 아침을 맞았다.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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