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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Aug 22. 2022

매일 300km를 운전하는 일

D+3, 하바롭스크로 가는 길

전날 늦게까지 술을 마신 탓에 숙소에서 컵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길을 나섰다. 하바롭스크를 목적지로 입력하고 구글 네비게이션을 따라 시내를 벗어나니 화면에 "A370 도로를 타고 769km 직진"하라는 안내 메시지가 나왔다. 직진이라는 단어와 769킬로미터라니, 이렇게 안 어울리는 한쌍도 있구나. 서울에서 부산까지 400킬로미터 남짓인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합이었다.


"일단 되는 데까지 가보지 뭐"


하루만에 갈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다. 따로 숙소를 예약해둔 것은 없다. 가다가 힘들면 아무 도시의 여관이나 들어가 하루를 묵을 요량이었다. 그렇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운전을 시작했다.

러시아의 고속도로(Highway)는 대부분 고속도로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다. 편도 1차선이고 속도는 90km/h로 제한된다. 노면의 상태도 고르지 않고 중간 중간 파였거나 갈라진 곳이 많아 고속으로 달리면 꽤 위험하다. 극강의 추위가 찾아오는 겨울마다 노면이 얼어붙었다가 다시 녹는 일이 반복돼서 도로를 정비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고 한다.


러시아의 도로

그런 편도 1차선 도로를 한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수십톤짜리 화물차들이 줄줄이 달린다는 게 문제다. 러시아 극동의 부동항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입해온 막대한 양의 화물을 서쪽으로 실어나르는 차들이다. 게다가 러시아 동부는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 등 몇몇 도시를 제외하면 상당히 낙후돼있어서, 오래된 6~9인승 승합차들이 매우 느린 속도로 다니곤 한다. 길에서 만난 한 러시아 여행자는 "그게 그들의 최고 속력이야. 어쩔 수 없어"라고 했다. 대부분 러시아 토종 자동차 브랜드인 라다(Lada)의 차량들이다.


러시아식 추월법이 여기서 등장한다. 앞서가는 화물차를 만나면 뒤에 바짝 따라붙는다. 뒤에서 중앙선을 살살 넘으며 마주오는 차가 없는지 살피다가 시야가 충분히 확보된 직진 도로를 만나면, 왼쪽으로 넘어가 빠르게 추월한 뒤 다시 원래 차선으로 돌아온다. 한국에서도 도심을 벗어난 국도에서 이렇게 추월하는 경우가 있기야 하지만 여기처럼 '기본값'인 적은 없었다.


마음씨 좋은 화물차 운전자들은 오른쪽 깜빡이로 신호해주기도 한다. "앞에서 아무도 안 와, 지금 추월하면 돼"라는 뜻이다. 반면 반대 차량이 오는데 내가 추월을 시도하려는 것 같으면 자신이 살짝 중앙선을 밟아주거나 클락션을 짧게 울리는 식으로 위험을 알려준다. 겉은 무섭지만 친절한 러시아 아저씨들이다.


이런 식으로 뒤에 바짝 따라붙으면 된다.


이렇게 운전을 하다보면 심심할 틈이 없다. 포트홀을 피하다보면 어린 시절 즐겨했던 펭귄으로 빙하를 달리는 아케이드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처음엔 아찔한 순간도 있었지만, 적응되고나면 나름의 문법이 다 존재해서 오히려 한국보다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도로에 차가 없는 것도 한 몫하고.


하염없이 달리다보니 저녁 시간이 다 됐는데 하바롭스크까지 가기는 무리인 것 같아 달네레첸스크에서 묵었다. 마음씨 좋고 말이 통하지 않는 할머니의 안내를 따라 허름한 여관방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다음날, 또 다시 하염없는 운전을 한 끝에 하바롭스크에 도착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도시이지만 많이 둘러볼 수는 없었다. 광장에 나가 분홍색으로 물든 하늘을 구경하다 숙소로 돌아왔다. 


하바롭스크의 레닌 광장. 러시아에선 어디서든 레닌을 만날 수 있다.3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아서 그런가, 생각보다 몸이 더 힘들어하는 것 같다. 얼추 계산을 해보니 모스크바까지 1만 킬로미터. 넉넉히 한달 안에 간다고 계산해도 하루에 300킬로미터 넘게 운전을 해야 한다(원래 계획은 3주였다!). 눈앞이 조금 깜깜해졌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내일부터는 이제까지보다 더 어려운 코스를 가야 한다. 그나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롭스크까지는 도로 사정도 좋고 벌레도 적은 편이라고들 하던데. 하지만 역시나 어떻게든 될 거다. 당분간은 이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여행할 것 같다.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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