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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Aug 21. 2022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첫 운전

D+2,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전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뒤 오늘까지 대행업체 직원 알렉세이와 함께 각종 세관 및 법률적 문제를 해결했다. 오전 내내 주블라디보스토크 한국 총영사관 등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공증 서류를 떼고 차량 보험을 가입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차량을 러시아에서 운전하려니 이것저것 복잡한 일들을 처리해야 했는데 알렉세이의 도움으로 한결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


업체에서 준 러시아의 도로교통 표지판 안내문. 이것만 알아도 훨씬 운전이 수월하다. 오른쪽은 알렉세이가 준 러시아 사과.


오후에는 차를 받았다. 오랜만에 보니 더 반가운 조심이. 긁히거나 문제 생긴 데 없이 잘 도착해서 다행이다.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 온 형님들 중 한 분의 바이크 부속품에 흠집이 생겼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고 큰 문제는 아니라서 넘어가기로 했다.


이제 안녕을 말할 시간. 형님들은 바로 우수리스크로 떠나고, 나는 블라디보스토크에 하루 더 묵고 내일 출발한다. 커다란 바이크 4대가 배기음을 내며 순서대로 러시아의 도로를 향해 출발했다. 나는 가족과 합의에 실패해 바이크 대신 자동차를 선택했지만, 여행하는 내내 러시아의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달릴 그들의 여정이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운이 좋다면 길 위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그들의 안전을 응원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서 형님들과 헤어졌다. 안전한 여행을 기도하며!


차를 받아 최종 점검을 하고 숙소를 향해 출발했다. 마음이 설레 왔다. 드디어 본격적인 여정의 시작이라는 느낌. 그러나 도로에 나가자마자 설렘은 당황으로 바뀌었다. 전날 시간이 남을 때 블라디보스토크의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교통을 충분히 살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와 시뮬레이션은 너무 달랐다. 여기저기서 울리는 클락션, 깜빡이도 없이 들어오는 옆의 차량들. 혼잡한 도로에 줄 서 있는 차들을 뚫고 나가야 하는 교차로.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핸들을 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능 시험을 합격하고 처음 도로주행을 나섰을 때의 마음이 이랬던 것 같다.


우리나라는 좌회전 차선과 직진 차선이 구분되어 있고 대부분 좌회전 신호도 있다. 종종 우회전 차선과 신호를 따로 마련해둔 곳도 있고. 반면 블라디보스토크는 차선과 신호의 구분을 거의 찾기 어려웠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그냥 직진 신호(초록불)가 들어오면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좌회전할 사람은 왼쪽으로, 우회전할 사람은 오른쪽으로, 직진할 차량은 앞으로. 모든 게 비보호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차들이 뒤죽박죽 섞이고 곳곳에서 클락션이 울린다. 결국 눈치와 뻔뻔함, 타이밍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물론 대부분의 도로가 편도 차선이고 좌회전 또는 우회전을 할 수 있는 교차로가 정해져 있긴 하지만... 이 정도면 그냥 비싼 차 우선 도로가 아닌가. 구글 내비게이션을 따라 빙글빙글 돌다가 앞차의 뒤꽁무니를 따라붙는 식으로 어찌어찌 숙소에 도착했다. 10분이면 올 거리를 30분 넘게 헤매고 나니 등이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도로는 혼잡했다


그러나, 그런들 어떨까. 길을 잘못 들었거나 못 가겠으면 그냥 천천히 돌아가면 된다. 조금 오래 걸려도 된다. 어차피 장기 여행자에게 '언제까지' '어디까지' 같은 건 무의미하니까.


저녁엔 호스텔에서 만난 사람들과 시내로 나가 술을 마셨다. 한국에서 가져온 차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할 계획이고, 이곳이 출발점이라고 말하니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2년 간 꿈을 꾸고 준비한 나도 그런데, 처음 들으면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까. 뭐가 됐든 시작이 어렵지, 일단 시작하고 나면 끌려가든 기어가든 어떻게든 가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 시작점에 와 있다. 내일부터 서쪽을 향해 주행을 시작한다.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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