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달 Aug 20. 2022

몰라봐주셔서 고맙습니다

D+1, 블라디보스토크 입항


난생처음 겪는 뱃멀미로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했다. 배가 꽤 흔들리고 있었다. 덩달아 비틀대며 갑판으로 나왔다. 구름이 가득하고 바람은 소리를 내며 불어오는 을씨년스러운 날씨. 한입거리도 안될 작은 새우깡을 들고 갈매기와 눈치 싸움을 하다, 어디로 가는지 모를 허름한 차림의 러시아 아저씨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동해항의 매표소에는 의외로 한국인보다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흰 피부에 파란 눈을 가진 이들이 카키색 조끼를 걸치고 긴 양말을 신은 전형적인 노동자의 모습으로 매표소에서 표를 구했다. 그들이 여권을 내면 매표소의 한국 직원들은 '불법체류자네요. 추방되는 거예요'라고 자신들끼리 정보를 전하곤 했다. 그런 경우가 열에 아홉은 됐다. 이들은 어디에 있다가 다시 어디로 밀려가는 것일까. 애초에 어디서부터 온 걸까.


오후 2시쯤 되자 항구가 가까이 보이기 시작했다. 선원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형광 주황색 조끼와 모자를 쓰고 줄을 끌어당기거나 수신호를 보내는 항구 노동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무표정한 눈짓과 약속한 듯 호흡이 맞는 몸짓. 퍽 익숙한 듯 보였다.



나는 일생일대의 여정을 시작하러 배를 타고 도착했지만 이들에게 그것은 매일 반복되는 단순한 작업에 불과하다. 출입국사무소 직원들에게도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을 거다. 짐짓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관찰하는 척하지만 실은 저녁 메뉴는 무엇으로 할까 따위를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휴양을 떠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은 낯선 타인들이 일상을 보내는 공간을 부유하는 일이다. 이 평범하고 낯선 이들에게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할 셈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부푼 꿈을 안고 당도했다 한들 온 도시가 한 청년의 꿈을 응원하고 환대해주는 우스운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누군가의 유일함 같은 건 자신의 일상을 깨부수지 않는 한 알 필요도 없는 일. 누군가에겐 차갑고 지독한 도시의 익명성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자유롭다.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 여기서 내가 누구인지는 나에게만 중요하고, 나만이 결정할 수 있다. 타인은 나에게 그저 타인일 뿐이다. 내가 그들에게 그렇듯이 말이다. 내 삶에 고개를 들이밀고 내가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고 침 튀기며 간섭하는 그 도시의 많은 이들이 이곳에는 없다.


"이래서 여행을 떠나 온 거였어"

이 무리한 여행을 그토록 떠나오고 싶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됐다.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작가의 이전글 여행의 시작은 새우잡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