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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Aug 19. 2022

여행의 시작은 새우잡이

D-0, 블라디보스토크로 배를 타고 떠나다

호기롭게 출발했으나 벌써부터 피곤하다. 200km 남짓. 일산에서 동해항까지의 거리다. 러시아에서 운전을 시작하면 하루에 500km 이상은 달려야 할 텐데.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벌써부터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오면서도 내내 '이게 맞나'를 고민했다. 막연히 여행을 준비하던 때는 기대가 한가득, 두려움은 한 줌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출발일이 다가올수록 두려움은 자기 지분을 탐욕스럽게 넓혔다. 그리고 이제는"내가 여기 주인이야!"라며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떵떵거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원체 겁과 불안이 많은 성격 탓인지 쉬이 마음을 잠재우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출발을 한 이상 방법은 없었다. 소란스러운 속을 다독이며 엑셀을 밟았다.


점심 먹고 출발했더니 동해항에 도착하니 벌써 저녁이다. 숙소 앞 횟집에서 술을 홀짝였다. 마지막으로 이 친구 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인사를 했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라'는 당부에, 사지와 오장육부를 멀쩡히 갖고 돌아가겠노라 농담을 던졌다. 어쩌면 이 여행을 가장 가볍게 생각한 건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빠뜨린 건 없는지, 법적인 준비는 모두 제대로 한 게 맞는지. 줄 잇는 고민을 "없어도 죽기야 하겠나.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말하며 잠재웠다. 꿈 속에서 나는 어딘가로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시 일어나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9시, 동해항 국제여객터미널로 향했다. 선적 및 세관 업무를 대행해주는 DBS페리 직원들을 만나 간단한 절차를 마쳤다. 사무실엔 나 말고 함께 탈 것을 배에 싣는 이가 5명 더 있었다. 한 사람은 한국에서 몽골로 돌아가는 바이커. 아쉽게도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아 대화를 거의 나누지 못했다. 다른 네 분은 네이버 카페 <이륜차 타고 세계여행> 동호회 분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바이칼 호수가 있는 러시아 이르쿠츠크까지 왕복하는 한 달의 여정이라고.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배에 차를 싣기 위한 준비를 했다. 생각보다 간단했다. 서류는 DBS페리 측에서 모두 준비해주었고, 나는 전편에서 얘기한 몇 가지만 추가로 제출하면 됐다. 이후 차량의 짐을 모두 꺼내 엑스레이 검사를 받고, 차량 내부는 또 따로 검사받는다. 그러고 나면 세관원을 만나 서류를 대조해 차량의 소유자가 본인임을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직접 차를 운전해 배 안에 실으면 끝! 거대한 여객선 안으로 차를 운전해 주차하는 게 생각보다 재밌고 쫄깃했다. 거대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

방도, 배도 생각보다 컸다.

2시에 배가 떴다. 한국과의 모든 연락도 끊겼다. 내일 오후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22시간의 항해.


아무것도 할 게 없는 배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지는 해를 쳐다보며 어떤 이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이 막막한 여행을 생각했다. 여행의 시작은 설렐 것 같았는데. 해괴하게도 훈련소로 들어가던 길이 떠올랐다. 언제 돌아올지 기약 없는 여행길. 마치 새우잡이 배에 올라 긴 항해를 떠나는 선원이 된 것만 같았다. 돈이 아니라 방랑을 벌러 가는 길이긴 하지만. 어쩌면 얼마 다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린 쓸 돈도, 방랑할 시간도 갖고 있지 않으니까.

바다 건너를 넘어가는 해가 많은 생각을 선물했다.


가만히 있어봤자 불안과 뱃멀미에 잠식될 것 같아 치킨 한 마리를 사들고 함께 배를 탄 형님들의 방문을 두드렸다. 소소한 선상파티가 시작됐다. 형님들은 이르쿠츠크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우수리스크에 들르신다고 한다. 그곳엔 독립열사인 이상설, 최재형 선생님들의 집터가 남아 있다. 후손으로서 감사를 드리기 위한 여행이기도 하다는 이야기. 내 여행의 의미를 반추했다. 아마도 나는 너무 많은 삶의 의미들에 치여, 아무 의미도 찾을, 주장할, 증명할 필요도 없는 시간을 좇아 여기까지 온 것 같기도 하다. 왠지 50을 바라보는 형님들이 나보다 더 젊다는 느낌이 들어 조금 부끄러워졌던가. 술을 꽤 마시고 침대에 누웠다. 배가 유난히 흔들렸다. 풍랑에 몸을 맡겨서인 건지, 풍랑을 거슬러 가느라 그런 건지.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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