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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Aug 18. 2022

긴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출발하기 전까지의 이야기



1박 2일 MT를 갈 땐 칫솔과 충전기만 챙기면 된다. (나머지는 보통 다른 누군가 갖고 있다!) 3박 4일 여행을 갈 땐 옷가지 몇 개와 노트북, 큰 카메라를 챙긴다. 한 달 정도 배낭여행을 떠날 땐 캐리어나 배낭 한 개 분량의 짐을 챙긴다. 그런데 일곱 달을, 대륙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려면 뭘 챙겨야 하는 건가. 감도 오지 않았다. 여행을 하다 보면 계절을 건널 것이니 사계절 옷이 다 필요했다. 캠핑을 하거나 요리를 하기 위한 살림살이도 있어야 하고. 외국에서, 외국인이, 한국 차량을 운행하려니 챙길 서류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건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여행을 준비했던 날들의 이야기다.


제일 중요한 건 역시 차량이다. 나는 현대차 투싼으로 여행을 했는데, 여행 내내 불편한 점은 전혀 없었다. 차량 선택을 하며 고민했던 건 네 가지다. 첫째, 사륜인지 이륜인지. 둘째, 차의 크기는 얼마나 커야 할지. 셋째, 차의 브랜드는 뭘로 할지. 넷째, 저렴한 중고차가 나을지, 가급적 신차가 나을지.


처음엔 중고차를 사려 했다. 그런데 '차가 중간에 퍼지면 어떡하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동차에 대해 잘 모른다. 직접 수리를 할 자신도 없고, 할 생각도 없었다. 게다가 오래된 차, 그러니까 보안 기능이 없는 차를 갖고 떠난 여행객들이 도난 사고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여러 군데서 들었다. 그래서 신차를 구입하기로 했다. 마침 가족이 함께 타던 차가 연식이 10년이 넘어, 새로운 가족 차량을 구입하는 겸 해서. 브랜드는 국산차 중에, 그나마 전 세계에 충분히 많이 팔린 현대차를 선택했다. (차가 많이 팔렸다는 건 충분한 서비스센터가 있고 부품 수급이 원활하다는 걸 의미한다.) 


원래 한창 유행이던 소형 SUV를 희망했으나, 수납공간이 너무 작아 투싼을 선택했다. 여행을 하면서 주로 캠핑을 할 예정이고, 캠핑 관련 장비와 식재료를 싣고 다닐 필요가 있었다. 아울러 유럽의 복잡한 도시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다닐 예정이라 자전거도 실을 넉넉한 공간이 필요했다.


4륜과 2륜 중에는 2륜을 선택했다. 일반적으로 횡단 여행자들이 선택하는 코스 중에서 4륜이 필요한 곳은 제한적이다. 몽골, 중앙아시아, 아이슬란드. 이렇게 3곳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2륜으로 큰 문제 없이 다닐 수 있다. 게다가 4륜이 연비도 나쁘고 차량 가격이 높은 터라. 여행 중 러시아에서 폭우로 길이 침수된 적이 있어 이 선택을 잠깐 후회했던 때도 있지만.. 발생하는 모든 돌발 상황을 고려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차량을 계약한 게 2019년 2월이고, 나는 나온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새 차를 몰고 유라시아 횡단을 떠나는 기행을 저질렀다. 다들 차 부숴서 오는 게 아니냐고 걱정했지만, 멀쩡히 한국에 돌아와 지금도 타고 다니고 있다. (물론 수리비 100만원을 긁고 조금 울었다)

이름도 지어줬다. 조심이.

그다음은 서류를 떼고, 이것저것 법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갖춰 나갔다. 사실 엄청 많지는 않다. 내가 직접 정부로부터 받아야 할 건 '영문 자동차 등록증''국제 운전 면허증', 그리고 '일시 수출입  신고서' 뿐이다. 보통 차량으로 국경을 통과할 때 3가지 서류를 요구받는다. 1) 차량 등록증 2) 면허증 3) 자동차 보험 (Green card). 이 중 차량 등록증과 면허증의 영문본을, 우리나라 정부의 도장이 찍힌 원본으로 들고 가면 되는 거다. 자동차 보험은 국가별로 따로 가입해야 하니 그때그때 신경 써서 챙기면 된다.

이렇게 생겼다. 대충 만든 것 같은 영문등록증서와, 제대로 만든 것 같은 국제운전면허증.

'일시 수출입 신고서'는 한국에서 러시아로 차를 보낼 때, 그리고 여행의 최종 목적지에서 한국으로 차를 보낼 때, 그리고 한국에서 차를 받을 때 모두 필요하다. 쉽게 말하자면 '일시로 수출하는 것이고, 내가 2년 내에 다시 수입할 테니 관세를 면제해주소서'라는 확인을 받는 제도다. 서류 준비에 관한 것은 차후 따로 정리해서 올리겠다.


서류 외에 또 신경 쓸 것들이 있다. '영문 차량 번호판'과 '국가식별기호'다. 차량 번호판의 한글을 국경 경찰들이 읽지 못하기 때문에 영어로 써주어야 하고, 국가식별기호 또한 국제법 상 필요하다. 보통 차량 번호판은 아크릴로 제작하거나 코팅해서 붙이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사진처럼 차량용 스티커를 주문 제작해서 붙였다. 여행 내내 단 한 번의 문제도 없었고, 심지어 주차빌딩의 기계도 이걸 읽더라. 차량 번호판은 종이로 인쇄해서 안쪽에 대충 붙였다. 원래 바깥에 붙이는 거라고는 하는데, 역시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전면과 측면 1열의 선팅을 제거했다. 여행 코스를 알리는 스티커도 만들어 붙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나는 여행자야! 딱 보기에도 그렇지!?'라고 티를 낸 셈인데, 이게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국경을 통과하거나 경찰 검문을 받을 때도 덕분에 의심의 눈초리를 덜 받을 수 있었다.

번호판과 국가식별기호는 출발할 때, 차량 뒷편과 측면의 스티커는 나중에 따로 붙였다.


이 즈음 나는 대학교 마지막 학기의 기말고사와 대회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래서 이외의 모든 준비는 마지막 2주 동안 해치웠던 걸로 기억한다. 각종 물품들을 쿠팡 로켓 배송으로 주문했다. 고민 없이 장바구니에 쓸어 담았다. 가장 친한 친구들을 만나 송별회 비슷한 걸 했다. 오장육부 잘 챙겨 오라는 친구들의 농담엔 내보이지 않는 걱정이 숨어 있었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들만큼이나 나도, 이 여행에 대해 한 치 앞도 모르고 있다는 걸. 현관 앞에 쌓여 가는 택배 박스만큼 여행에 대한 두려움도 차올랐다.


배는 6월 30일 일요일에 뜬다. 나는 29일 토요일에 미리 동해항 근처에서 숙박하기로 했다. 집에서의 마지막 날인 금요일, 엄마와 함께 이마트에서 장을 봤다. 엄마는 카트에 자꾸 무언가를 담았다. 통조림으로 된 김치, 장기 보관할 수 있는 장조림과 깻잎 무침, 햇반, 각종 조미료, 누룽지와 미숫가루까지…. 나는 연신 그것들을 카트에서 다시 빼냈다. 나는 가볍게 떠나고 싶었고, 엄마는 무겁게 보내길 원했다. 수심 가득한 엄마의 입매를, 당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미간을 푸느라 괜한 농담을 던졌다. 그렇게 넣고 빼며 몽니를 부리며 마지막 밤에 도착했다.

덕분에 예상보다 많은 짐을 싣고 떠나게 됐다.


"가고 싶지 않다." 전날 밤의 심정은 그랬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내가 이 먼 길을 떠나나. 집엔 가족이 있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강아지도 있었다. 마쳐야 하는 학업과 시작해야 하는 취업 준비도 있었다. 여행의 경로에서 내가 무엇을 배울지, 무슨 일이 펼쳐질지 알지 못했다. 유라시아 횡단을 떠나는 바이커들은 유서를 쓰고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그래야 하나" 하다, 이 무슨 청승이냐 싶어 그만뒀다. 이제 와서 무를 수는 없었다. 사실은 이미 여행길에 올라서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빛내며 여행 계획을 떠벌이던 그때부터, 지도를 펼쳐놓고 연필로 수만 킬로미터의 선을 긋던 그때부터. 긴 탈주의 꿈을 품었던 날부터 나는 이미 여행자였다.


결국 날은 밝았다. 떠나야 했다. 점심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넘겼다. 차에 짐을 모두 실었다. 18년을 함께 산 강아지 토토와 마지막 인사를 했다. 얼마 남지 않는 생명의 시간이, 부디 7개월 후까진 기다려주기를 기도하면서. 가족들과는 짧은 인사만 했다. 힘들면 언제든 돌아오라는 가족들의 목소리를 뒤로 하며 액셀을 밟았다. 배기음이 들린다. 음악을 틀었다. 동해로 향한다. 여행의 시작이다.


떠나기 10분 전과 1분 전.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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