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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Aug 18. 2022

프롤로그: "죽으러 가는 거야?"

유라시아 대륙횡단, 낭만으로 도망쳤던 기록

#0. 프롤로그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하게 된다. 아니 사실은 몇 번쯤, 몇십 번쯤. 내가 나약해서, 또는 내 삶이 유달리 팍팍해서도 아니다. 잘 익은 사과를 보면 한입 베어 물고 싶고, 노곤한 저녁 침대를 보면 눕고 싶듯이. 쏟아지는 과제에 휴학 버튼을 누르고 싶고, 몰아치는 업무에 사직서를 내고 싶은 것처럼. 누구나 삶의 질곡 앞에선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때의 내가 그랬다. 스물다섯, 길었던 대학 생활로부터 도망치듯 입대했다. 이런저런 사건들이 있었다. 쏟아지는 말과 평가들, 무너지는 관계와 희미해지던 삶의 목표. 불행의 기억은 3초에 한 번씩 떠올라 나를 괴롭혔다. 과거는 고통스럽고 미래는 불안했다. 뭐 누구에게나 그런 '현대병'을 앓는 시간이 있기 마련인데, 나에겐 그때가 그랬다. 라디오헤드의 <No surprises>를 들으며 우울에 잠기고, 콜드플레이의 <Fix you>를 들으며 구원을 꿈꾸던 날들. 나도 도망치고 싶었다.


우연히 알게 된 '유라시아 횡단 여행'은 그래서 꿈이 됐다. 동해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배를 타면, 그다음부터는 온전한 자유의 세계라는 말에 이끌렸다. 보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많았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보는 일'과 '가는 일', 그러니까 자유로이 떠도는 '유랑'이 하고 싶었다. 그러다 관광도 할 수 있다면 겸사겸사 좋은 거고. 여행을 준비하는 게 우울증 치료제가 됐다. 틈만 나면 컴퓨터 앞에 앉아 노르웨이의 협곡을, 이탈리아의 해안도로를 검색했다. 먼저 다녀온 이들의 여행기를 훑고 설렘에 잠 못 드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도망자의 꿈이 머릿속에 넘실댔다.

달리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노르웨이 Geiranger, Norway


그렇게 2년을 준비했다. 돈을 모으고, 법을 알아보고, 대충의 계획을 짰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 북유럽으로 올라갔다가, 동유럽과 남유럽, 터키를 여행한 뒤 서유럽의 해안을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까지 가는 여정. 원래는 오토바이로 갈 생각이었지만, 가족과의 합의에 실패해서 (...) 자동차 횡단으로 바꿨다. 돈을 모으느라 한창 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하던 때, 신촌의 맥주집에서 술을 먹다 친구가 농담처럼 물었다. 여행 계획을 얘기하며 눈을 빛내던 내게, "죽으러 가는 거야?"라고.


어이없게도 눈물까지 글썽이던 친구의 모습이 웃겼지만, 또 가만 생각해보면 웃을 일만은 아니었다. 한국에서의 운전 경험도 충분하지 않고, 혼자 여행을 떠나 본 적도 없던 사람이 반년 간 수만 킬로미터를 달리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돈은 어떻게 할 거냐는 물음에 "적당히 텐트 치고, 정 안되면 차에서 자면 되지 뭐."라고 말하는 실없음은 객기로 보일 소지가 다분했다. "자유롭고 싶어서 가는 건데, 계획은 짜서 뭐하냐!"라며 지도에 선을 술술 긋고 계획의 전부라고 말하던 내 얼굴도 퍽이나 철없어 보였을 테다. 출발일이 다가오자 한숨이 늘던 어머니의 얼굴도, 아마 그래서였을까.


뭐,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계획 없는 탈주는 무사생환으로 끝났다. 떠났고, 세계를 둘러봤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경이로운 광경을 보며 환호를 지르기도 하고, 몇 번은 아찔한 순간을 겪기도 했다. 호숫가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며 행복해했고, 텐트 안에서 덜덜 떨며 잠에 들었고, 홀로 싸구려 와인을 홀짝이다 굶주린 배가 서러워 울먹인 때도 있었다. 실컷 세계를 유랑하던 유목민은 '이제 집에 가야지.'라고 결심하곤 아쉬움 절반, 안도감 절반을 갖고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익숙한 듯 낯선 내방 침대에 누워 '행복해지진 않았지만 행복할 준비는 된 셈인가' 따위의 생각을 하며 잠에 드는 얘기. 꽤 진부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호숫가에서 마주한 경이로운 장면 Inari, Finland


한국에 돌아온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이제야 무언가를 쓸 수 있게 됐다. 곳곳에 담아뒀던 여행의 조각들을 천천히 꺼내볼까 한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다. 그저 과거의 고통과 미래의 불안에 힘겨워하던 한 사람이, 취업도 졸업도 때려치우고 떠났던 유랑의 기록이다. '내가 어떻게 도망쳤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이 진부한 '도망기'가 그대에게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언제든 도망칠 수도, 돌아올 수도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도망 없이도 살게 하니까.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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