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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Sep 26. 2022

젖은 텐트 안에서, 달과 별과 오로라

D+82, 노르웨이 로포텐

비가 온다. 낮에는 분명히 맑았는데 왜 저녁만 되면 비가 오는 걸까. 아침에 일어나 젖은 텐트를 적당히 수건으로 닦은 후 텐트를 개서 차에 넣는다. 며칠째 비가 내리니 젖은 텐트를 닦는 수건마저도 젖어있다. 방법이 없다. 차 뒷좌석에 매어둔 간이 빨래줄에 수건을 걸고 하루를 보내다, 저녁쯤 되면 다시 젖은 텐트를 펼친다. 쿰쿰한 냄새가 괴롭게 코를 찌른다. 축축한 침낭에 들어가 겨우 눕는다. 텐트는 연신 빗줄기에 얻어맞고, 안쪽까지 스며든 물방울이 텐트의 주름을 따라 흐르다 얼굴 위로 떨어진다.


내일은 지붕과 벽이 있는 숙소에 들어가서 자야 할까. 하루 예산이 7~8만원인데 숙소값에 10만원 넘게 써도 괜찮은 걸까. 그러고나면 또 끼니를 빵과 바나나로 때워야 할까. 안그래도 식료품도 기름값도 너무 비싸 예산을 반쯤 초과하는데, 이러다 여행 막바지에 돌아갈 돈도 남지 않으면 어쩌지. 애초에 6만원짜리 값싼 텐트를 들고 온 게 문제였을까. 아르바이트를 뛰어서 돈을 더 모아야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물을 끓여 데워둔 텐트 속 공기가 빠르게 식는 걸 느낀다. 옷을 몇겹을 껴입었지만 너무 춥다. 덜덜 떨며 겨우 잠에 든다. 연일 내리는 비에 텐트도, 침낭도, 마음도 온통 젖어버렸다.


노르카프에서 내려와 로포텐 제도에 왔다. 오는 길에 정비소에 들러 엔진오일을 교체하려 했지만 하나같이 일주일은 걸린다고 했다. 한 장소에 일주일이나 머무르면 다음 경로에 차질이 생긴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노르웨이 해안선에서 팔처럼 삐죽 뻗어나와 있는 로포텐 제도를 가기로 했다. 제도에 들어가기 전 정비소에 들러 약속을 하고, 일주일간 로포텐을 둘러본 뒤 나올 때 교체하면 시간이 얼추 맞겠다 싶었다.


계획은 좋았는데. 로포텐의 날씨는 변화무쌍해 종잡을 수가 없다. 낮엔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가도 저녁만 되면 구름이 끼고 비가 내렸다. 평소에는 비가 오면 떠나버리면 되는 것인데 (실제로 노르카프에서 내려오는 중간 중간 트롬쇠같은 도시들을 건너뛰었다) 엔진오일을 갈기로 예약을 해뒀으니 그럴 수는 없는 상황. 임시로 자전거용 방수천에 구멍을 뚫고 차에 묶는 식으로 간이 플라이를 만들며 버텼다.


방수천으로 만든 간이 플라이. 비가 너무 새서 텐트 위에도 비닐을 덧댔다.

노르웨이의 물가는 살인적이다. 휘발유가 리터당 2천300원쯤 하고, 담배는 한갑에 2만원쯤. 양파나 당근, 감자 같은 것은 '한 개'에 천원, 이천원씩 한다. 숨만 쉬어도 하루에 쓰기로 정해둔 예산이 간당간당할 지경이니 게스트하우스나 산장에서 머무르는 것은 사치였다. 샤워실과 실내 공간이 딸린, 돈을 내고 묵는 캠핑장도 3~4일에 한번씩 아껴서 가야 했다.


좋았던 순간들이 없지는 않았다. 산에 올라 '바다 위의 알프스'라는 이름을 가진 레이네(Reine)를 내려다보고, 폴란드 출신 히치하이커들을 만나 짧은 동행을 한 일. 로포텐제도 가장 끝자락에 있는 '오(Å)'라는 작은 항구마을을 걸어다니며 탐험한 일. 텐트에 숨어 삼겹살을 구워먹고 라면을 끓여 먹으며 '이게 인생이지!' 싶었던 날도 있었다.


레이네. 오른쪽은 레이네브링겐에 올라 내려다본 모습. 낮에는 하늘이 무척 파랬지만, 이날 밤에도 비가 왔다.
땅끝마을 오 탐험. 오른쪽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밖에서 구워먹은 삽겹살. 최고의 맛이었다.



하지만 추운 북극권의 밤을 젖은 텐트와 젖은 침낭으로 버티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로포텐에 있는 동안 진한 감기에 걸려버렸다. 아프면 쉬어야 하는데. 이러다 몸이 축나겠다 싶어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을 두고도 얼른 남쪽으로 내려가야겠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떠나지도 머무르지도 못하고 로포텐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긴 기다림을 끝내고 로포텐을 빠져나갈 때가 되니 그제서야 날이 갰다. 왜 다들 로포텐을 말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지만 이제는 반대로 더이상 머무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쉬운 발걸음을 옮겨 제도를 빠져나왔다. 일주일 전 약속했던 하르스타(Harstad)의 정비소에서 엔진 오일을 교체했다. 일주일만에 만난 정비소 직원은 따봉을 날리고 차키를 받아갔고, 커피 한잔을 마시는 동안 교체가 끝났다.


로포텐을 빠져나오는 길, 그제서야 날이 갰다.


남쪽으로 내려와도 추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낮동안 맑은 하늘과 바다를 보니 울적한 마음이 조금 가셨다. 내일 가기로 한 국립공원 근처 캠핑장에 자리를 잡았다.


밤엔 별이 무척 많았다. 텐트에 누워 별을 보다, 저 멀리 호수 한켠이 빛나는 게 보였다. 밖으로 나가 도깨비불에 홀린 사람처럼 반짝이는 호숫가로 나가 광채의 원인을 찾았다. 달빛이었다. 달이 어찌나 밝은지 호수에까지 내려와 반짝이고 있더라. 김용택 시인의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라는 시를 좋아하는데, 누구라도 이런 달 아래서는 사랑하는 이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지리라. 돌아오는 길엔 찬란한 오로라가 북두칠성을 휘감고 있었다. 북극권을 떠나기 직전 세번째 오로라를 만났다. 남들은 오로라를 보러 왔다가 한번도 못보고 돌아가기도 한다는데, 이런 행운이 또 있을까. 별빛과 달빛, 오로라가 "그동안 고생했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춥고 젖은 마음에 달빛이 따뜻해 조금 뭉클했다.


오로라와 달빛. 달 밑에 빛나는 부분이 호수다.


시커먼 밤하늘을 누비며 춤추는 이 초록빛 커텐을 살면서 다시 볼 수 있을지. 기회가 닿는다면, 또 의지가 있다면야 기회는 또 오겠지. 그러나 지금같은 느낌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텐트 안에서 덜덜 떨다가도 오로라와 별빛에 추위를 잊고 뛰쳐나가는 지금의 젊은 시절. 감기로 연신 코를 훌쩍이면서도 텐트의 창문은 쉬이 닫지 못하고, 꽤 오래 별빛을 바라보다 잠에 들었다.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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