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83, 노르웨이 스바티센
마주쳤을 때 눈물짓게 만드는 무언가를 좋아한다. '슬프거나 기쁘거나'라고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마음속에 쌓인 무언가가 터져 나오는 순간. 경이로운 무언가를 마주했을 때 울컥 솟아나는 감정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빛바램이 없다. 시베리아의 숲속에서 나뭇잎보다 많은 별을 보았을 때, 핀란드 호수에서 수면에 떠 오른 오로라를 보았을 때, 노르카프에 당도해 저 너머 보이지 않는 북극을 마주했을 때. 긴 여로에서 무언가는 잊혔지만, 이런 순간들은 여전히 선명하다.
그런 경험을 또 어디서 할 수 있을까 찾던 와중에 사진 한 장을 보았다. 스바티센(Svartisen) 국립공원의 거대한 빙하가 바위산을 가득 메운 풍경. 별로 인기가 없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한국인의 후기가 전혀 없었다. 왠지 흥미로워져 며칠 전부터 맑은 날을 고르고 골라 마침내 도착했다. 하루는 주변 캠핑장에서 잠을 자고 이튿날 등반을 시작했다.
성수기에는 근처까지 차를 몰고 들어와서 보트를 타고 3km만 걸으면 빙하를 볼 수 있는데, 비수기라 보트도 없고 도로도 막혀 있는 상황. 그러려니 하고 하이킹을 시작했다. 2km 정도 흙길을 걸어가면 보트 선착장이 나온다. 이후 4km 정도를 호숫가를 따라 걸어야 하는데, 대부분 크고 미끄러운 돌인데다가 중간중간 돌이 없는 구간은 어쩔 수 없이 물을 건너야 했다. 호수를 지나면 보트의 도착지점이 나오고, 여기서부터 빨갛게 칠해진 길잡이 돌을 따라 완만한 바위산을 3km 정도 걷는다. 이렇게 대략 10km를 걷고 나면 멀찍이서 빙하를 볼 수 있는 지점에 도착한다. 그러나 여기서 볼 수 있는 건 빙하의 끝자락에 불과해서 성에 차지 않았다. 저 뒤로 분명히 거대한 빙하가 보이는데, 10km를 걸어놓고 여기서 끝내기엔 아쉬운 거지.
그래서 암벽을 오르기로 했다.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암벽'이라고 써두었지만, 실제로는 물과 빙하로 채워졌던 과거의 흔적을 따라 오르는 길이었다. 여기부턴 정식 루트가 아닌 건지 표식도 없고 간간이 앞선 여행자들이 세워둔 돌무덤 정도만 보였다. 등산스틱은 뒤에 메고 돌벽은 네 발로, 구릉은 두 발로 올랐다. 한 시간 정도 그렇게 올랐을까. 수도 없이 깔딱댄 끝에 이 봉우리의 정상이라고 부를만한 곳에 도착했고, 그때서야 거대한 빙하를 한눈 가득 조망할 수 있었다. 없는 길을 따라 오르고 올라 만난 인생 첫 빙하. 차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다른 빙하를 갔다면, 보트를 타고 가이드를 따라서 왔다면 '와~ 신기하다!'에서 그쳤을지도. 그러나 어려운 길로 왔기에, 혼자 묵묵히 4시간가량 걸은 끝에 만난 빙하에 조금은 울컥했다.
아무도 없는 산에서 '그것만이 내 세상'을 틀어두고 텀블러에 담아온 인스턴트 커피를 홀짝였다. 지친 발을 꼼지락대며, 바나나를 까먹으며 멍하니 빙하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져, (약간의 오글거림을 감수하고) '나는 행복하다!'라고 세 번쯤 소리 내어 외쳤다. "나는 행복한 걸까" 수도 없이 스스로 물었던 지난날들. 오늘만은 끝맺음이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라 다행이야.
슬슬 내려갈까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가까이서 한번 보고 갈까' 싶은 마음에 아래로 발을 옮겼다. 이제까진 올라오는 길이었지만, 이번엔 내려가는 길이라 훨씬 더 아찔했다. 실수로 등산스틱을 떨어뜨렸는데 통통 튀기며 암벽 아래로 떨어지는 스틱을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눕다 엎드리다 반복하며 빙하 앞에 도착. 그런데, 빙하가 너무 빠르게 많이 녹는다.
기후 변화로 빙하가 녹는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사정없이 녹아내리고 있을 줄이야. 위에서부터 녹아내린 빙하의 잔해가 물줄기로 모여,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계속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물줄기 소리가 끊임이 없어서, 또 너무 커서 당혹스러웠다.
녹는 빙하를 보면서 지구온난화나 북극곰의 생존을 걱정할 법도 하지만, 나는 문득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여행을 다닌 적이 별로 없다. 20대엔 사회에, 30대엔 취업난에, 40대엔 가정을 돌보느라 시간을 빼앗겨서. 그리고 엄마의 시간을 가장 많이 훔친 건 아마도 나일 것이다. 그런 내가, 그런 엄마를 두고 혼자서만 이렇게 긴 여행을 하고 있다. 빚진 마음이 아려올 때가 많다. 앞으로 살면서 갚아나가야지, 엄마에게도 이 아름다운 곳곳을 직접 보여줘야지 다짐한다. 그러니까 빙하가 이렇게 빨리 녹아버리면 안 되는 거다. 엄마가 와서 볼 수가 없으니까.
종종 통화하면서 엄마에게 "여기 너무 멋져! 다음에 꼭 같이 오자!"고 말하지만 엄마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내가 다시 바빠질 걸 알아서. 사실 나도 확신은 없다. 돌아가서 취업해버리면 한동안 여행은 어려울 테고, 그 사이에 엄마는 더 나이 들겠지. 어쩌면 진짜 빨리 녹고 있는 건 빙하가 아니라 엄마의 젊음일지도 모른다. 그걸 알면서도 비겁해지기는 싫어서, 괜히 애꿎은 빙하만 탓했다.
하이킹을 마치고 늦은 시간 스바티센 바로 근처 모이라나(Mo i Rana)라는 작은 마을에 왔다. 숙소 벽에 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다. 언제 찍은 건지 모를 옛 스바티센 빙하의 모습을 담은 사진. 그때는 호수까지 닿아 있던 빙하의 팔이 이제는 한참 안쪽에서 그치고, 그 아래로 주름진 구릉만 속절없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