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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Oct 10. 2022

배고파서 더는 못 걷겠어

D+91, 노르웨이 트롤퉁가

스바티센보다 조금 더 아래, 노르웨이에서의 3번째 산행을 하러 트롤퉁가에 도착했다. '거인(트롤)의 혀'라는 곳. 깎아지른 바위 절벽에 올라 한눈에 링게달 호수를 내려다볼 수 있고, 마치 혓바닥처럼 튀어나온 바위 위에 올라 찍는 인증샷이 유명해 노르웨이 3대 하이킹 코스로 꼽히는 곳이다.


전날은 등산로의 초입 지점 주차장에서 차박을 했다. 텐트를 치는 게 아니라, 진짜 차 안에서 자는 차박. 늦은 시간에 도착해 숙소를 구하기도 어렵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지 오래돼 더 이상 밖에서 캠핑을 할 수 있는 날씨도 아닌지라, 차에서 침낭과 이불을 둘둘 둘러메고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적당히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오전 9시쯤 등반을 시작했다. 왕복 28km의 산길을 지나 해발 1,100m를 오르는 꽤 긴 산행. 전날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그간 체력이 떨어진 탓인지 시작하자마자 지쳐버려서, 중간에 포기할까 여러 번 고민했다. "그래도 일단 가는 데까지는 가보자"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계속 걸었다. 처음이 가장 힘들고 고통은 언젠가 적응된다는 건, 삶에서 빼놓지 않고 가져가는 소중한 마음가짐 중 하나다.


7km 지점을 계획보다 일찍 지나게 되어 한숨 돌리고 구석에서 잠깐 쉬었다. 아직 절반밖에 오르지 않았는데 눈에 보이는 풍광이 멋졌다. 저마다의 개성을 자랑하는 기암절벽 사이로 호수가 우아하게 몸을 뉘이고 있었다. 적당히 쉬고 다시 일어나 나가려는데, 길잡이 돌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노르웨이의 산은 우리와 다르게 루트가 분명하지 않아서 곳곳의 길잡이 돌을 잘 따라서 가야 하는데. 휴대전화의 나침반 기능도 먹통이 됐다. 결국 기억을 되살려 길을 갔지만 정반대로 들어서고 말았다. 동남쪽으로 가야 하는데 서북쪽으로 간 것. "조금만 더 가면 길잡이 돌이 나오겠지"라는 우직한 기대가 발목을 잡았다.


빨간색 T가 그려진 게 길잡이 돌이다.


길을 완전 잘못 들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30분 정도 지났던 시간. 패닉이었다. 다시 돌아가는 데 30분을 쓰고, 거기서 다시 7km를 가려면… 일몰 전에는 내려가야 하는데, 시간이 많지 않았다. 급하게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가기 위해 뛰었다. 도중에 뛰어넘기에는 넓고 돌아가자니 너무 많이 돌아가야 하는, 근데 또 어찌어찌 내려가서 건너면 건널 수 있어 보이는 작은 협곡을 만났다. "한번 가볼까" 싶었고, 그게 오산이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옛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데. 발을 헛디뎌 바위에서 추락해 개울에 빠졌다. 결국 영하의 날씨에 가슴 아래로 몸을 온통 적셨다.


몸을 추스르고 다시 올라오니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러다 꼼짝없이 야간 산행을 하게 생긴 터라,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야 할까" 고민을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게 아쉬워 더 가보기로 했고 그때부터 구보가 시작됐다. 다른 등산객들의 동정 어린 시선이 쏟아졌다. 조그마한 동양애가 온몸이 젖은 채로 뛰고 있으니 그럴 법도.


어찌 됐든 헉헉대며 뛰어온 끝에 목표지점인 트롤퉁가 바위에 도착했다. 왜 모두가 극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바위 끝(생각보다 넓어서 그렇게 아찔하지는 않았다)에 서서 밑을 내려다보면 기암절벽 곳곳을 노니는 푸른색 호수를, 끝없이 펼쳐진 비경을 볼 수 있었다. 뿌듯함을 느끼며 가방을 열었는데, 아뿔싸. 14km 떨어져 있는 차 안에 음식을 빼놓고 왔다.



길을 잘못 들고, 물에 빠지고, 음식을 놓고 오다니. 스스로의 멍청함에 화가 났지만 이 돌산 한가운데서 방법이 없었다. 온통 젖고 굶주린 채로 어둑한 14km의 길을 내려가야 한다는 걸 깨달은 게 5시. 일몰은 7시. 어떻게든 내려가야 하니까 걸음을 서둘렀다. 너무 춥고, 너무 배가 고팠다. 먹을 게 없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지고 점점 더 굶주린 감각이 심해졌다. 호숫물로 배를 채워도 보고, 산의 정체 모를 열매도 주워 먹어 봤지만 소용은 없었다.


먹고 죽을까봐 찍어둔 열매. 다행히 별일은 없었다


다시 7km 남은 지점에 도착해 단 한걸음도 걷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저 멀리 구호 오두막이 보였다. 평상과 각종 구급 용품이 있는 작은 오두막. 간절한 마음으로 찬장을 뒤져봤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누워 있었는데, 오두막 문이 벌컥 열리고 마운틴 가드가 들어왔다.


"너 지금 비상 상황이야?"

"어… 아니, 나 그냥 조금 쉬고 있었어.

그런데 정말 미안한데, 혹시 음식이 조금 있어? 나 완전히 굶주렸어"


그는 자신의 배낭을 열더니 봉투 하나를 건넸다. 안에는 뜨거운 물을 넣으면 따뜻한 볶음밥이 완성되는 (군대에서 먹던 바로 그것) 비상식량과 건포도, 초콜릿이 있었다. 그는 내게 핫초코를 타주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나는 음식을 허겁지겁 속에 넣으며 자초지종을 털어놨다. 그는 내게 흔히 있는 일이라며, 내려가는 길의 행운을 빌어주었다. 살면서 먹은 가장 맛있는 저녁이었는데 힘들어서 사진도 못 찍은 게 아쉽다.


배도 채웠는데 뭐가 문제일까. 이미 해는 져버렸지만 헤드라이트에 의지해 터벅터벅 걸어 내려와 결국에는 완주에 성공했다. 이날만은 사치를 부리겠다며 꽤 괜찮은 숙소를 잡고, 소시지와 김치를 한껏 넣어 부대찌개를 만들어 먹고 따뜻한 요에 들어가 누웠다. 살면서 가장 춥고 배고팠던 날이지만, 덕분에(?)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었던 날. 아마 나는 트롤퉁가의 압도적이었던 풍경보다도, 이날 오두막에서 얻어먹은 한 끼의 식사를 더 오래 기억할 것 같다.


내려오던 길의 풍경도 아름다웠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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