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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Oct 15. 2022

이러다 불법 체류자가 되겠어

D+98, 베를린으로 가는 배 위에서


    며칠간 헐레벌떡 남쪽으로 내려왔다. 하루에 3~400km씩 달리며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스웨덴의 예테보리, 덴마크 코펜하겐을 훌쩍훌쩍 넘었다. 덴마크 남부에 게드서(Gedser)라는 항구가 있는데, 이곳에서 페리를 타고 2시간 정도 발트해를 건너면 독일의 로스토크(Rostock)에 도착한다. 길었던 북유럽 구간도 끝나는 셈이다.

로스토크 바로 위, 삐죽 튀어나온 곳이 게드서다.


    누가 도끼를 들고 뒤에서 쫓아오는 것처럼 서둘러 내려온 이유는 비유럽 국가 시민의 무비자 체류 기한을 정해둔 솅겐(Schengen) 조약 때문이다. 조약에 따라 나는 솅겐조약 가입국(EU 가입국과 거의 일치한다)에 90일 간 무비자로 체류할 수 있는데, 핀란드와 노르웨이에서 40일 넘게 써버렸다. 지도를 펴놓고 남은 거리를 생각할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러다가는 스페인에 도착할 때쯤 솅겐 조약을 어긴 '불법 체류자'가 되는 게 아닐까. 공항에서 벌금을 두드려 맞는 스스로를 망상하다 보면 지극히 현실적인 걱정이 엄습했다.

보라색과 파란색이 솅겐 조약 가입국이다.


    북유럽은 초등학교 시절 기다리던 여름방학 같았다. 망망대해 같던 러시아가 끝나고 국경을 넘어 핀란드에 도착했던 때의 신났던 마음. 머릿속엔 벌써 설렘 리스트가 손가락이 모자라게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스웨덴, 덴마크를 지나 헐레벌떡 달려내려 온 요 며칠까지. 모든 방학이 그렇듯 아쉬움을 남기며 끝은 흐지부지, 하지 못한 것들이 마음에 남지만 다음으로 미뤄둘 수밖에. 


   일정을 고민하다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서 가보고 싶었던 몇 개 나라를 코스에서 제외했다. 체코,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들이 계획에서 빠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후회했다. "그때 그러지 말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핀란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냈던 며칠이, 노르웨이에서 피오르가 너무 아름다워 '오늘은 여기서 자자!'하고 멈춰 섰던 순간들이. 그 시간들을 아꼈다면 어땠을까. 아름다움은 그곳에만 있는 게 아닌데. 취해서 푹 빠져있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무릉도원에 다녀왔더니 폭삭 늙어 있었다는 옛 동화의 젊은이처럼.


    그러나 동시에 "언제 제일 행복했지?"라는 물음을 던진다면 주저 않고 핀란드 레피니에미에서 보냈던 무용한 5일을 꼽을 테다. 무민 과자를 오독오독 먹으며 햇살이 비친 책장을 넘기던 날들. 참 좋았어. 그리고 또. 덜덜 떨면서도 오로라를 보느라 텐트 창문을 닫지 못하던 날, 빙하를 봤던 스바티센과 굶주렸던 트롤퉁가, 로바니에미에서 만났던 산타와 노스케이프의 순록들. 그 모든 것들이 후회의 구렁텅이에서 나를 꺼내어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삶의 동력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던 때도 있었다. 과거의 일들을 짊어질 자신이 없어서, 모든 어른들이 존경스럽게 보였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삶을 다른 색으로 색칠하러 여행을 떠났고, 북유럽에서 초록색과 파란색 물감을 한껏 얻어가는 느낌이다. 방학 동안 방학숙제는 안 했지만, 예쁜 펜과 물감을 한껏 사두었으니 앞으로 잘할 수 있을 테다.


    뭐 아무튼, 덕분에 당분간은 쉴 틈 없이 바쁘게 달려야 하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수식어를 달 수밖에 없는 공간, 북유럽. 그럼 안녕, 언젠가 또 보자고!


북유럽의 풍경들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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