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00, 독일 베를린
군 생활의 목표 중 하나는 '말로만 듣던 대가들의 책을 한 권씩은 읽어보자!' 였다. 그렇게 집어든 책이 지그문트 바우만이 쓴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였다. 그때부터 전쟁과 폭력의 문제에 집중했던 것으로, 저널리스트라는 삶에 대한 방향성도 뚜렷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자유로움'이 모토이고 계획이 바뀌길 밥먹듯이 하는 이 여행에서도 두 도시는 항상 고정되어 있었다. 베를린과 바르샤바. 70년 전, 가장 많이 죽였던 자들의 도시와 가장 많이 죽었던 이들의 도시. 궁금했다. 어떻게 그 모든 것들을 짊어지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그대들은 정말로 과거를 극복했는지. 그 해답이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 있는 우리에게 너무도 절실한 것이라서.
이런 비장한(?) 마음으로 베를린에 도착했다. 모스크바 이후로 오랜만에 대도시에 온 터라 차들로 꽉 찬 도로와 여기저기서 울리는 클락션이 낯설었다. 30분정도 헤맨 끝에 겨우 숙소 근처에 차를 댔다. 하루는 가이드와 함께, 하루는 혼자 도시를 둘러봤다.
모 서점의 광고를 조금 바꿔보자면, 사람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사람을 만든다. 공간의 배치와 구성을 보면 거주민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그리고 무엇에 영향 받으며 살아가는지 유추할 수 있다. 베를린의 공간은 온통 고통과 참회, 평화에 대한 기도로 가득차 있었다.
히틀러 집권의 계기가 되었던 화재사건이 일어났던 국회의사당, 나치에게 살해된 국회의원들을 위한 추모기념물, 나치당원들이 책을 불태웠던 장소. 학살된 유대인들을 위한 추모기념물과, 집집마다 붙어 있는 그 집에 살았던 유대인의 기록. 동서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과 체크포인트 찰리 검문소. 나열이 벅찰 정도로 너무 많은 공간들. 그곳에는 독일 사람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또는 어떻게 기억해야 한다고 믿는지가 온통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런 도시에서 다시 전쟁과 폭력을 꿈꾼다는 것이 가능할까. 물론 네오나치가 그것이 가능함을 증명하고 있어 조금 슬프지만.
옛 베를린 장벽 근처에는 '공포의 지형(Topography of Terror)'이라는 곳이 있다. 지금은 사라진 게슈타포 본부 건물 터에 지어진 박물관으로, 나치 독일의 만행을 시간대 별로 여러 증거 자료와 함께 기록해둔 곳이다. 한 독일인 교사가 학생들을 앉혀놓고 사진들을 가리키며 역사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곳을 떠난 후로도 그 눈빛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자국이 과거에 행했던 끔찍한 범죄를 아이들에게 가르친다는건 어떤 일일까.
베를린에는 이런 종류의 박물관이 참 많았다. 나치의 '통치'를 기록한 공포의 지형 외에도, 당시 유대인들의 고통을 전시해둔 유대인 박물관도 있다. '낙엽(Shalekhet)'은 당시 유대인들이 겪은 공포를 상징적으로 재현한 일종의 설치 작품이다. 바닥엔 사람 얼굴 모양의 철판 수천 개가 놓여 있고, 관람자는 그 위를 직접 걷는다. 철판이 서로 부딪힌다. 그 소리는 텅 빈 윗공간의 벽을 마구 때리며 거대하게 울려댄다. 제작자는 그것이 살해당한 유대인의 비명처럼 들리길, 관람자가 그 공포를 조금이라도 느끼길 바랐다고 한다. 나는 눈을 감았다. 한쪽 벽에 손을 대고 한 발자국씩 천천히 옮겼다. 20분 가량을 그저 걸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걸어가던 그들의 공포를 그려보면서.
어린 아이일 때, '내가 살아있는 동안엔 제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순진하게 바랐었다. 스무살은 더 먹은 지금도 그 바람이, 그 두려움이, 그 어두운 전망까지도 여전히 그대로다. 이 세계에서 나는 한 명의 시민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나- 요즘들어 줄곧 생각한다.
베를린의 유명한 브란덴부르크 개선문 옆에 '평화의 방'이라는 작은 공간이 있다. 여행자들이 들러 명상과 기도를 할 수 있게 마련해둔. 잠깐 주어진 자유시간 동안 그곳에 앉아 우리의 공간과 역사는 어떤지 생각했다. 나의 할 일에 대해서도. 여행 이후 무엇을 하며 살지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발견했다. 나오며 동전 몇개를 기부했는데, 준 것보다 받은게 너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