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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Sep 19. 2022

대륙의 북쪽 끝, 노르카프에 닿다

D+70 노르웨이 노르카프

횡단 여행자라면 누구나 꿈에 그리던 여행지가 있기 마련이다. 이 길고 긴 여행길을 결심하게 만든 몇 가지 계기들. 그것들은 마치 옛 설화 속 도깨비불 같아서 한번 홀리면 대책이 없다. 머릿속에서 연거푸 그 길을 달리는 상상만 하며 잠이 오지 않는 밤을 보내다 보면, 그곳에 도달하지 않고는 해갈할 수 없는 갈증을 느끼게 된다.


내게는 어느 날 우연히 봤던 사진 속 노르웨이의 도로가 그랬다. 어디서 봤는지, 언제 봤는지 알 수 없지만 깎아지른 절벽과 시원한 바다 사이를 유유히 달리는 자동차가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았다. 트롤스티겐의 산악과 로포텐 제도, 수많은 피오르드 사이를 달리는 것이 꿈이 됐다. 게다가 노르웨이에는 이번 여행의 4가지 꼭짓점 중 하나인 노르카프(Northcape)가 있다. 그러니까 나는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에 이제 막 발을 딛는 셈이다.


노르웨이에서 만난 이름 없는 도로. 대충 이런 느낌의 사진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벅차오르는 마음을 안고 힘차게 노르웨이에 진입했는데, 이게 웬걸. 첫 이틀은 참 어려웠다. 노르웨이의 도로는 대부분 폭이 매우 좁고 중앙선이 없다. 마주오는 화물차나 캠핑카라도 만나면 정말 아찔하게 지나쳐야 한다. 현대차의 차선 유지 보조 시스템은 이걸 한 차선으로 인식해 운전을 방해한다.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 같은 언덕길, 연속되는 급커브, 가드레일 없는 벼랑, 중간중간 고르지 못한 노면 상태와 갑자기 튀어나오는 순록과 양 떼… 비까지 오는 바람에 꽤 고생을 했다.


가까스로 밤늦게 북극해의 항구마을에 도착했지만 쏟아진 비로 캠핑장 상태가 영 좋지 않아 잘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결국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왔는데 마땅히 잘 곳이 없어 해안가에 차를 대고 바위 절벽 아래서 야영을 했다. 맑은 날이면 운치라도 있었겠지만, 몰아치는 비바람에 파도는 밤새 철썩대 쉽게 잠들기가 어려웠다.


이틀 정도 지나 노르웨이 도로에 적응이 되자 운전은 한결 수월해졌지만 또 다른 난관을 만났다. 운전이 익숙해져 주변 풍경을 둘러볼 여유를 갖게 됐는데, 지나치게 경이로운 탓에 눈을 어디로 돌려도 두지 않을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거대한 바위산과 절벽, 산중의 폭포와 에메랄드빛 호수, 푸른 바다. 마치 좋은 책을 읽을 때처럼 중간중간 도저히 멈추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 풍경들이 많아 나는 연거푸 차를 세워야 했다. 내가 만난 불편들은 이 경이로운 풍경을 온전히 남겨두기 위한 것이라는 걸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핀란드를 떠나 노르카프로 올라가는 여정은 그래서 엉금엉금 느렸다.


길을 가다 아무곳에나 차를 세워도 그림같은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노르카프 아래, 스칼스버그의 한 캠핑장에 자리를 잡았다. 이름부터가 Northcape Basecamp. 노르카프를 찾아온 여행자들의 쉼터 같은 곳이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하루를 이곳에서 보냈다. 비가 오는 탓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장을 이용하거나 캠핑카에 머물렀는데, 나 말고 딱 한 명 텐트에서 캠핑하는 사람이 있었다. 텐트는 너무 춥고 젖어있기 때문에 그도 나도 부엌에 붙박이처럼 머무르는 신세였고, 자연스레 말을 붙이게 됐다.


그의 이름은 요한. 덴마크 출신 자전거 여행자이다. 덴마크의 시골 도시로부터 4,000km가량을 한 달 반 동안 달려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 여행을 하다 보면 다양한 수단으로 저마다의 길을 밟는 이들을 만난다. 히치하이킹을 하던 알렉산드리치, 자전거로 여행을 떠나온 요한, 바이크를 탔던 형님들과 자동차로 여행하는 노부부들. 심지어 전동 킥보드로 러시아를 여행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직은 만나보지 못했지만 도보로 횡단 여행을 하는 이들도 있다고 들었다.


비행기나 기차, 배를 이용한 여행은 점에서 점으로 뜀뛰기 하듯 이동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자동차나 바이크, 자전거 같은 것들을 이용하면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선이 그려진다. 그 선 위에서, 점과 점을 오갈 때는 몰랐던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생긴다. 선을 여행하는 이들을 만나면 모종의 공감대나 유대의식을 느낀다. "너도 고생하고 있구나" "많이 힘들지" "하지만 정말 아름답지 않아?" "너의 여행을 응원할게" 같은 것들. 우리는 거기에 더해, 어쩔 수 없이 각자 터득하게 된 길에서의 생존 팁들을 공유하며 낄낄대는 저녁을 함께 보냈다.


Northcape Basecamp 캠핑장의 모습. 순록이 텐트 앞까지 놀러오곤 했다.

다음날 잠깐 비가 멈춘 틈을 타 노르카프로 올라갔다. 차로 15분 정도 올라가니 "이곳이 북쪽 끝이야!"라고 말하는 듯한 작은 기념관과 이곳의 상징인 지구본 모양의 조형물이 보인다. 사실 노르카프 바로 옆에 위도상 조금 더 북쪽인 곳이 있기야 하지만, 어찌 됐든 공식적으로는 여기가 유럽의 최북단이다. 유럽 사람들에게도 살면서 한 번은 꼭 밟고 싶은 곳이라고 하더라.


만약 내가 비행기나 열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방문하지 않았을 테다. 방문하더라도 별 감흥이 없었을지도. 그러나 자동차를 타고 여행하는 내게, 이 북쪽 끝 꼭짓점의 의미는 각별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기까지 달려온 긴 여정이 모두 아로새겨진 느낌. 조금은 뭉클해진 채로 끝없는 북극해를 멍하니 응시했다. 북극해의 파도는 세찼다. 바다가 내게 자꾸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노르카프를 상징하는 지구본 모양의 조형물


이곳에 오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오고 싶지 않았다. 하나의 꼭짓점을 성취할 때마다 여행의 끝에 가까워져 간다. 그 끝이 받아들이기 싫은 것이라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때로는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 됐든 끝나야만 하는 여행이니까. 언젠가 도착할 마지막 꼭짓점에서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봐야지. 물론 아직 많은 날이 남아있어, 가까운 미래에도 나는 모종의 유목민이다.


이곳을 기억할 물건을 구입하곤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하나의 목표이자 반환점이었던 노르카프. 이곳을 돌아 앞으로는 길고 긴 노르웨이의 해안선을 따라 남하한다.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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