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달 Sep 17. 2022

이나리 호수의 작은 숲

D+66, 핀란드 이나리


어제는 1박에 20유로짜리 캠핑장에서 묵었는데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격자형으로 촘촘히 짜여진 캠핑장에서 자리 하나를 골라 텐트를 펴야 했는데, 눕고나니 다른 텐트들과 가지런히 오와 열이 맞춰져있어 한국의 아파트가 연상됐다. 내일 당장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녁을 먹고 오솔길을 산책하는 와중에 호수 건너편에 모닥불과 캠핑카 몇대가 보였다. 저곳이다 싶어 구글맵으로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해뒀다. 체크아웃을 한 뒤 방향을 잡고 지도를 보며 길을 따라가다보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기대는 적중. 앞으로는 커다란 호수가 있고 뒤편으로는 나무에 둘러싸인 조용한 캠핑스팟을 발견했다. 어제 묵었던 사람들도 모두 떠난 모양인지 아무도 없었다.



아이스박스 속 식재료들을 보다가 샌드위치를 먹기로 결심했다. 비상식량으로 먹던 식빵에 양배추를 올리고, 예전에 사둔 달걀과 양파, 소시지를 볶아 안에 넣고 바나나까지 썰어 넣으니 완성. 호수를 보며 캠핑 의자에 앉아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먹고 있으니 자연인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이렇게 혼자 숲과 호수에 둘러싸여 있노라면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포레스트>가 떠오른다. 세상살이에 지친 청춘이 시골로 옮겨와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보내는 이야기. 극중 김태리 배우가 분한 '혜원'은 왜 돌아왔냐는 친구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배가 고파서"라고.


한국에 있을 때 문득, 내 삶이 내것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구도 내 삶을 강제하거나 억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생활이라는 원고지 위에 물음표는 연신 고개를 들었지만 마침표는 좀처럼 찍히질 않았다. 해야만 하는 삶의 과제들은 하나의 부품이고 나는 그 앞에 선 노동자처럼 느껴졌다. 오도가도 못하고 아픈 다리를 주무르지도 못하며, 선 자리에서 그저 끝없이 달음박질 쳐오는 부품을 조립해야 하는 신세. 그렇다면 대관절 나의 노동과 인내를 양식 삼아 완성되는 조립품은 무엇인지, 나는 그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통령도 경제인도, 교과서 속 인물들과 심지어 소설의 주인공들도 '자유'를 말하지만 나는 "자유로운가"라는 물음에 답하기는 커녕, 단어의 실질조차도 손아귀에 잡지 못하고 몽롱하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그때 삶이 고팠다. 내 삶을 내가 소유했다는 감각이 고팠다.


캠핑, 특히나 와일드캠핑은 고달프다. 전기도 물도 없다. 어느정도의 위험도 동반된다. 비바람이라도 몰아치는 날엔 덜덜 떨면서 잠에 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 조그마한 곳에서 나는 자유롭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홀로 내가 하고 싶은 사소한 일들을 한다. 해본 적 없는 요리를 시도하고, 나무를 모아 모닥불도 피워보고. 어수룩한 손길로 뭔가를 만들거나 고친다. 쓸데없는 일을 하는게 이렇게 행복한 일인줄, 필요한 일만 해내기에도 바빴던 시절에는 알지 못했다. 아무도 침 튀기며 내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묻지도 않는 곳. 밤에는 별빛이 보이고 아침에는 태양과 함께 물안개가 오르는 나만의 작은 숲과 호수. 조금 춥고 불편했지만 왠지 나는 이곳에서 고픔을 덜 느꼈다.


밤에는 알렉산드리치에게 배운 방법으로 모닥불을 피워놓고 영화를 봤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눈 앞에 펼쳐진 풍경.


별들이 밤하늘을 촘촘히 수놓고 하늘 저편엔 노을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리고 호수를 거울삼아 홀연히 휘감는 오로라를 발견했다.


"우리 행성에서의 삶도 그리 나쁜 건 아니구나."


뭐 그런 천진하고 거만한 생각도 이번만은 괜찮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앞에는 호수, 뒤에는 숲, 발치에는 모닥불과 익어가는 소세지, 테이블엔 와인과 영화. 하늘에는 별빛과 오로라. 그야말로 완벽한 핀란드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요정과 산타, 순록과 늑대, Sisu와 Hei, 호수와 오로라의 나라 핀란드. 안녕 고마웠어!

다음날에는 일출과 함께 물안개가 꼈고, 나는 라면을 끓여 먹었다.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작가의 이전글 산타를 만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