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중 내가 좋아하는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시절도 있었지. 우울증 기간이었어. 그때는 하루가 전부 다 감흥이 없었어. 그나마 내가 죄책감을 덜 느꼈던 시간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남들이 다 나와 똑같이 잠드는 밤 11시 격이었을 꺼야. 하루는 누워있는 눈가로 뜨거운 눈물이 흐르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 이 시간만큼은 남들도 자니까 나도 자는 게 괜찮을 거야.
지금은 무어라도 하고 싶고,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기분이 들어. 일상이 평온해 보이는 편이지. 30대 중 후반인 나에게 24시간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을 고르라면, 주저 없이 해질녘이라고 말할래. 해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저물어가는 시기, 하늘이 불그스름 물드는 시기, 그때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라고.
요즘 현대인들은 갑갑한 빌딩 숲에 갇혀서, 해 뜨는 것도 해지는 것도 잘 못 보지. 낮 동안 쨍쨍하게 우리를 비추었던 해가 퇴근할 때는 진짜 찬란한데, 그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이 보내는 때가 많아. 나 또한 예전에는 그랬었지.
20대 초반이었어. 어학연수를 가기 위해 토플을 공부했던 때가 있었어. 내가 다녔던 학원은 H 학원이었는데, 그 학원의 가장 특화된 부분이 ‘스터디’였어. 학원 수업 이외에 스터디원들을 짜주어서 공부를 하고 체크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주었지. 그 스터디 그룹이 학원의 80프로 이상을 차지했다고 생각해. 스터디 그룹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성적이 많이 향상되었거든.
한 언니기 있었어. 학원을 같이 다녔는데, 스터디 그룹은 참여하지 않는 언니였지. 우연한 기회에 학원이 끝나고 저녁식사를 같이 할 기회가 있었어. 코엑스 푸드코트였는데, 하늘이 보이는 창이었지. 언니랑 이야기를 나누는 중 해가 저물고, 하늘이 붉어지더라. 사실 언니가 말하기 전까지는 난 해지는 시간인 줄 몰랐어. 그런데, 언니가 갑자기 하늘을 바라보더라고. 자기는 이렇게 해가 지는 시간이 너무 좋다면서, 이 시간 때문에 스터디를 하지 않는다고. 지금은 그 언니의 이름도 얼굴도 생각나지 않아. 하나 뚜렷이 떠오른 건 그 언니의 삶의 철학이었지. 노을을 꼭 보겠다는 마음.
사실 그때는 인생의 앞만 보고 달렸던 시기라, 언니의 소리가 헛소리라고 치부했어. 아니 당장 100점 맞는 게 더 중요하지, 하늘이 붉어지던지, 해가 지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말이야. 당장 취업하는 게 중요하지, 노을이 지는 시간 따위가 뭐라고.
그런데, 삶을 살아보니까.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이 참 위대하더라. 아무 조건 없이,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감사하더라. 나도 매일 꼬박꼬박은 아니지만, 해지는 걸 유의 깊게 보지. 요즘은 해가 빨리 저물더라. 더 분주하게 챙겨보지 않으면 지나갈 시간이라,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고 있지. 하늘이 붉어지는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수능 시험공부를 위해, 중간고사 공부를 위해, 석사 졸업 논문을 위해 끊임없이 앞만 보고 달리던 나는 이제서야 하늘의 노을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어. 조금 더 빨리 알았다면, 인생이 덜 조급하고 풍요로웠을 텐데.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그게 어디야.
찬란한 순간들. 태양이 지는 순간, 난 분주했던 모든 일상을 내려놓고, 그냥 바라보게 되더라.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어제는 잠깐 놓친 노을, 오늘을 꼭 붙잡으려고 해.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 없을 하늘의 변화이지만, 그게 나에게 어떤 치유 제보다 좋을 때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