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첨물 Dec 28. 2022

얽힘의 시대(2)

양자역학을 다시 생각하며

국소적 인과성

그때까지 과학의 사고는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분리성에 바탕을 두었다.비국소적 인과성의 영역인 마법과 관찰과 무관한 실재의 영역인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류가 오랫동안 거쳐 온 지적 여정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책 앞쪽에 나오는 이 문장은 20세기를 여는 양자역학의 태동기를 설명하는 분위기를 잘 나타내주었다.

오래전 인간은 벼락이 치거나 별똥별이 떨어질 경우, 신이 인간에게 메시지를 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벼락이 치는 것과 김서방이 노름을 하는 것은 서로 인과성이 없지만 김서방이 벼락을 맞아 죽을 경우, 노름을 하는 사건이 벼락을 치는 것에 영향을 주어 사건을 발생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인간 중심중의로 오랜 시간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권력이 만들어지고 사회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원리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7세기 르네상스 이후로 과학 혁명이 일어나면서 과일껍질 주변에 초파리가 생겨남을 보고 과일이 초파리를 만든다는 인과성에 의문을 둔 과학자가 밀폐된 병에 과일을 넣을 경우 초파리가 생겨나지 않는 것을 실험한 후, 더 이상 두 사건이 서로 연결된, 인과성을 가지는, 비국소적인 사건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고의 흐름은 신으로부터 인간이 더 이상 괴롭힘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사상과 정치 체계를 만들었으며, 인간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천부인권 사상까지 나타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1900년 프로이트는 신의 계시가 아닌 전날 일어난 일련의 사건의  흐름이 꿈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을 완전히? 설명하는 꿈의 해석을 통해 정신분석학의 문을 열 수 있었다.


뉴턴 역학, 멕스웰 방정식 등의 고전 역학의 자신감이 지구와 태양계를 설명하는 것에서부터 총알, 포탄의 정확한 타격 위치까지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즉 여러 가지 입력 변수들만 알게 되면 미래 어느 시점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될 것인지 알 수 있다는 자신감은 1,2차 세계대전의 비이성적인 사건 앞에 무너지게 된다. 인류가 알 수 있다고 자만했던 과학의 결과가 과연 어디까지 인간을 비극으로 치닫게 만들게 될 것인가라는 막연한 공포심과 불확실함은 인간 이성에 대한 불신까지 낳으며 미술계와 음악계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양자역학은 이러한 시대적 맥락 속에서 태동하게 된 새로운 과학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플랑크의 흑체복사 실험 결과를 해석하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물체에 열을 가해 온도를 높이면 특별한 파장의 빛을 방출한다. 마치 난로에 장작을 넣어 불을 때면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다가 더 온도가 오르면 불빛이 노란빛을 나타내기도 한다.

즉 온도가 높을수록 장파장에서 단파장의 빛을 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연구하며

관계식을 만들다가  열에너지가 온도의 4 제곱에 비례한다는 슈테판 볼츠반 법칙이 발견되고 그때 나오는 빛의 파장은 온도에 반비례한다는 빈 변위법칙이 만들어진다.

그러다가 플랑크는 1900년 12월 방출된 빛에너지가 특정한 상수와 진동수를 곱한 값의 정수배로 가정한다. (E= nhv ) 즉 방출된 빛의 에너지가 연속적이지 않고 어떤 기본 에너지 hv의 정수배라는

양자 개념을 처음 도입하는데 이렇게 가정하여 만든 수식이 실험결과와 더 잘 들어맞았다.

물론 오늘날엔 e = (n+1/2) hv라는 영점 에너지 1/2hv 가 추가되었지만 플랑크의 양자 가설은 에너지가 불연속적이라는 것을 처음 언급하며 양자역학의 시작을 열었다.

물론 플랑크 자신은 아인슈타인과 더불어 고전역학을 우선시하며 양자역학의 철학적 산물로 나온 비결정론을 죽을 때까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에너지의 양자화 개념은 빛을 입자로 보는 광자 개념을 만들며,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 실험

즉 특정 주파수를 가진 이상의 빛을 금속에 비치면 전자가 튀어나온다는 내용으로 전통적인 빛의 파동설을 부정하며 빛이 입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실험이었다. 에너지를 가지는 광양자, photon.

마치 당구공처럼 빛을 입자로 생각하고 전자가 가득한 금속에 부딪치면 특정 운동량을 보존하면서 특정 각도로 전자와 빛이 튕겨져 나가는 현상은 영락없이 빛이 입자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실험은 과학자들을 혼돈 속에 빠뜨렸다.

1700년대 영의 이중슬릿 실험으로 빛이 파동이라는 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였던 과학자들이 갑자기 빛이 입자의 특성을 보인다는 실험결과를 보고 어떻게 이걸 설명할까 고민하였다.

이러한 복잡한 질문에 젊은 청년 보어가 나타나 빛은 입자와 파동 두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고 입자와 파동은 서로 '상보적'이다라는 독특한 개념을 만들어낸다.

즉 하나가 존재하면 다른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한 위치를 알면 정확한 운동량은 모른다.

이렇게 자연계에 존재하는 두 가지 성질을 찾아 서로 상보성을 가지고 있다고 퉁 쳐서 말했다. 이러한 모호성을 두고 보어는 "진리와 명확성은 서로 상보적이다."라고까지 표현한 것 보면 당시 과학자들이 얼마나 이러한 기이한 현상을 이해하기 어려웠나 싶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러한 비합리성, 모호성을 과감히 부정하며 애매모호하게 기보다는 확실하게 틀리겠다고 도전한 존 슈튜어트 벨은 어느덧 주류로 자리 잡은 양자역학에 제대로 된 한방을 먹일 생각으로 "벨 부등식"을 만들어낸다.  아인슈타인- 포돌스키-로젠 (EPR 패러독스)라는 논문으로 아인슈타인이 그토록 양자역학의 불완전함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을 벨이 명쾌한 부등식을 만들어냄으로써 제대로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 핵심은 국소성을 부정하느냐 인정하느냐이다. 즉 두 개의 입자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아니면 서로 얽혀 있어 영향을 주고 있는가 이다.  

아인슈타인은 빛 입자 (hv를 가지는 광양자) 각각이 고유한 독립성, 즉 다른 것들과 얽혀 있지 않은 성질을 지닌 존재임을 밝히려고 50여 년을 궁리하였다. 그것은 입자의 특성을 가지는 광자가 어떻게 회절현상, 즉 서로 영향을 주어 회절현상이라는 파동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밝히려고 한 것이리라. 그래서 아주 좁은 공간에서는 얽혀 있을 수도 있다는 즉 유령 파동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입자 각자가 지나갈 때 주변에 파동을 만들면서 나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후 많은 실험 물리학자들은 단 하나의 광자, 전자만으로도 서로 얽혀있고 파동을 만들고, 스스로 간섭 현상과 회절 무늬를 만들어내는 것을 밝혀냈다.

입자 스스로 자기 자신과 간섭하여 회절 무늬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대학원 수업시간 때 이 이야기를 처음 들으며 칠판 한 가득을 채운 수식을 설명하시던 교수님이 생각난다.

스물서너 살 때 이와 같은 현상을 알아낸 1900년대 천재들의 대화와 논문들을 21세기가 되어서도 이해하기 어렵고 용어조차 낯설어하는 하는 나를 보며 자괴감도 들었었다.


교수님은 그때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인간이 오랜 역사 속에서 보이는 세계 즉 mm 단위에서 수십 km 단위의 세계를 인지하고 살아오면서 DNA 안에는 생존하기 위한 인식 체계가 각인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직관'이라는 것을 만들었고 오늘날 인간이라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현상. 즉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서로 개체들은 분리되어 있다. 눈앞에 있는 사물은 꿈속의 사물과 다르게 실제로 만질 수 있고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눈에 보이지 않게 작은 세계나 거대한 우주 세계가 돌아가는 것에서 인간의 직관과 다른 현상이 2존재하게 되고, 그걸 인간 눈에 보이는 영역과 동일시하며 생각하게 될 경우, "있을 수 없는 일", "반 직관적인 현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닐 수 있지 않을까?


또 하나 얘기하신 것은 '네가 양자역학이 틀렸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무수한 과학자들이 의심하고 의심하며 부정하려고 했던 지난 과학사들을 모두 훑어보고도 틀린 점을 찾을 수 없다면 일단 인정하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설명할 수 있었는지를 보라고 하셨다. 마치 교회에서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믿고 시작하라'는 것처럼.




그렇다면 국소성(서로 분리되어 있다.)과 실재성 중 결국 국소성을 포기하고 서로 상호작용을 한 두 입자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빛의 속도보다도 빠르게 서로 영향을 준다. 사실 빛의 속도보다 빠른 것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즉각적으로 영향을 준다. 즉 얽혀 있다고 인정하게 된 것일까?

양자 얽힘은 1935년 슈뢰딩거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아인슈타인과 더불어 양자역학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만든 사고 실험이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이다.

상자 안에 1시간에 50% 확률로 붕괴되는 방사선 원소가 망치를 작동하여 독가스 병을 깨뜨릴 수 있도록 설치한 후 고양이를 넣어 둔다. 1시간 후에 고양이는 살았을까? 죽었을까? 아니면 50% 확률로 살아있는 상태와 50% 확률로 죽어 있는 상태가 중첩되어 있을까? 그는 양자역학 추종자들의 주장하는 중첩 상태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이러한 사고 실험을 만들었는데, 막상 만들고 나니 원자 주위의 전자들이 이러한 중첩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가장 완벽한 설명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살아있는 고양이와 죽어있는 고양이가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거시 세계가 아닌 미시 세계에서 이와 같은 걸 증명하려고 대표적인 전자의 스핀과 빛의 편광 성질을 이용하여 실험하는 것이 있다. 결국 이 실험은 2022년 알랭 아스페, 존 프랜시스 클라우저, 차일링거 세 명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특히 차일링거 교수는 사이즈가 큰 분자 (C60)를 이중 슬릿을 통과시켜 간섭무늬, 즉 파동을 확인하였다.

전자, 광자가 아닌 탄소 원자 60개가 연결되어 있는, 누가 보더라도 입자로 보이는 것도 파동의 특성을 가진다. 그는 고양이를 던져도 파동을 확인할 수 있다고 농담처럼 말했다고 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덩어리와

물결 파동의 경험적 지식이 얼마나 한계가 있는 것인가 싶다.

이것이 이 책의 전체적인 스토리이며 1900년대부터 2022년까지 현재 진행형으로 과학계를 넘어 사회 전반적으로 영향을 끼쳤고 현재도 끼치고 있는 "양자 역학"의 대략적인 이야기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주사위 하나가 있다. 이걸 던져서 윗면이 나오는 수를 적어본다.

1부터 6까지.. 각각 1/6의 확률로 나오기 때문에 처음엔 들쭉날쭉 각각의 숫자가 빈도수를 가지고 분포하겠지만 점차 1~6이 골고루 비슷한 횟수로 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놀랍지 않은가? 직육면체의 형상이 정대칭이라는 사실이 각각의 면이 동일하게 바닥면에 위치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1부터 6까지가 확률론적으로 그 사건이 발생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

좀 더 쉽게 아주 얇은 동전을 던져보자 그럼 앞면과 뒷면이 여러 번 던졌을 때 비슷한 빈도수로 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분명 앞면과 뒷면 둘 중에 하나는 윗면을 향해 위치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안다.

OK. 그럼 사고 실험을 다시 한번 해 보자

그럼 흰 당구공 하나가 당구대 위에 돌고 있다고 가정하자. 흰색 당구공이 완전히 구체이므로 흔들림 없이

회전하고 있는데, 너무나 빠르게 회전하고 있어서 시계방향인지 반시계 방향인지 알기 어렵다고 가정하자

이 회전 방향을 알기 위해서는 손을 대 보거나 무언가를 이 당구공에 접촉시켜 봐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시계 방향으로 돌던가 반시계 방향으로 돌던가 확률이 반반이라는 것을

다음은 공 색깔을 바꿔보자. 공 색깔은 검은색 아니면 흰색이다. 그러나 불을 꺼 놓아서 알 수가 없다고 하자

두 가지 색깔 중 하나라는 것을 알지만 불을 켜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그럼 이 두 가지 성질을 모두 합쳐서 불이 꺼져 있는 당구대에 흰색 또는 검은색 당구공이 시계방향 또는 반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불을 켜서 색을 확인하거나 만져서 공의 회전 방향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불이 꺼져 있는 당구대에 회전하는 당구공의 색과 회전 방향은 알지는 못하지만 각각 1/2의 확률로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미 정해져 있는 사건을 우리가 부족한 정보로 알지 못할 뿐이라는 입장이 아인슈타인의 생각이다. 그러나 보어는 불을 켜지 않고 만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검은색과 흰색의 중접상태 또는 시계방향과 반시계 방향의 중첩 상태로 당구공이 존재한다고 말한 것이다. 벨은 이러한 보어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부등식을 하나 만들어 본 것이다.


엄청 많은 당구공이 당구대에 이렇게 돌고 있다고 가정할 때, 불을 켜서 검은색 당구공만 골라내자

그러고 나서 다시 불을 끄고 이번에 접촉을 해서 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는 당구공만 골라내자

그러고 나서 다시 불을 켜보자. 당연히 검은색의 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는 당구공만 선택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부등식을 만들었는데, 전자를 가지고 실험을 해 보니 검은색과 흰색 당구공이 섞여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정확히 반반으로...

이게 말이 되는가 싶어 여러 번 해 보아도 동일한 실험 결과가 나왔다.

그러고 나서 결론은 공의 색깔과 회전이 서로 상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두 개의 특성이 서로 얽혀 있다고 했다. 너무 거시적으로 실험 조건을 잡아서 사고 실험을 했지만 아인슈타인과 보어가 이렇게 서로 사고 실험 세트를 만들어서 서로의 논리적 모순을 공격하고 방어한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실험 물리학자들이 이걸 실험으로 결론 내려주었다.


정확한 실험 세팅이 되었다면 여러 실험실에서 진행해도 양자역학이 맞다는 결론이 나서 결국 오늘날

과학 교과서에 양자역학이 실리게 된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느냐하고 주장해보아도 실험 결과가 계속 그렇게 나오니 그냥 자연의 미시세계는 이런 게

생겨먹었구나 하고 인정하게 된 것이 현재 과학계이다.




물론 시간, 차원의 개념이 새롭게 발견되고 양자역학이 사실 알고 보니 다차원 세계의 한 보습으로 보였고

그래서 3차원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그렇게 측정했구나 하는 미래가 있을 수 있다. 과학은 항상 열려있으므로 아직까지는 양자역학이 정설이라고 하지만 언제든지 틀릴 가능성을 인정하고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실험 결과만을 두고 그냥 재밌다 하고 넘어가지 않고, 양자역학은 철학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비결정론적 세계관, 확률론적 세계관을 만들어 인간 사회에 깊숙이 스며들어 고전적 세계관을

바꾸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은 내가 잘 모르는 분야지만....

어쨌든 양자역학이 나오로 100년이 넘게 흘렀고 비로소 퀀텀이라는 단어가 QLED TV부터 시작해서

퀀텀 수학학원 이름에 까지 우리들의 일상에 자연스러워지고 있지만 그 내용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지는

못한 상태이다. 기독교가 서구 역사 1000년이 지배하며 사람들의 인식 체계에 영향을 주었다면

양자역학은 아직까지 물리적으로 더 시간이 지나야 사람들 내면까지 영향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얽힘의 시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