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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첨물 Aug 29. 2020

뉴 노멀 시대

힐링을 위한 글쓰기

자다 일어나서 문득 생각을 해 보았다.

교회 목사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리고 코로나가 퍼져나가는 이 시기에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나이를 들어가면서 한이 많이 쌓여서 그런가


유치원 선생 - 아이를 가진 부모

집주인 - 세입자

검찰 - 피고인

대기업 - 중소기업

교수 - 학생

목사 - 신자

상사 - 부하

언론 - 시민

코치 - 선수

남성 - 여성

부모 - 아이

대통령 - 국민

미국 - 한국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무질서의 약육강식의 동물세계로부터 '질서'라는 인간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개인의 욕망과 공동의 선 사이에서 끊임없이 전선이 생겨난다.

질서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상하관계가 생기고, 갑을관계가 생긴다. 그러나 그것이 계약관계를 넘어서 '권력자'와 '희생자'의 관계로 발전할 경우 갈등과 폭력이 발생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정상'적인 관계들새로운 정상(new normal)적인 관계로 변화한다. 노예제가 정상에서 비정상으로 변하면서 사라졌듯이. 아니 노예라는 말이 다른 용어로 변화했듯이.





나는 어른이면서 국민이고, 부하이면서 상사이다. 이렇게 얽히고 얽힌 관계망 속에서 내가 빨간색 줄을 잡고 있는지 파란색 줄을 잡고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여러 줄들이 나를 관통하고 있고, 때로는 당기고 때로는 당김을 당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화가 나는 것은  나를 얽어맨 줄들이 나를 당기는 힘이 세면서 아프기 때문이 아닐까? 나이가 들면서  당기는 힘이 약해지고 그러면 나를 밀어주는 집단의 줄들을 잡고 싶어진다.  잠시 동안 중력의 힘이 없어지는 듯한 황홀함이 마약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 줄들이 다수가 아닌 소수가 되고,  내가 정상이고 다른 이들이 비정상이라 생각했던 것이 뒤바뀌게 된다.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세계가 되었다. 존댓말을 해야 할지 반말을 해야 할지, 눈치를 봐야 할지 자존심을 세워야 할지 끊임없이 이리저리 쳐다봐야 알 수 있다. 다수의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 그 망설임을 끊이없이 겪고 느끼지만, 어느덧 계단 위에 서서 듣기보다는 말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들은 이 변화가 너무 낯설다. 질서 있는 세계를 바란다라고 하지만 어느덧 새로운 질서에 자신이 어울리지 않은 존재라는 사실이 너무 무섭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나...

 


이제 그들과 이들이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내가 그가 될 수 있고, 그도 나와 같은 인간이란 종족임에 연민이 느껴진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철학적 물음이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덮친 시점에 개인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상 기후와 더불어 이상하게 보이는 사람들의 행동이 다 이유가 있고 사연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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