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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첨물 Oct 11. 2021

시녀 이야기

왕의 백성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민이 주인인 세상에 살 것인가?

지인의 추천으로 읽게 된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



미래의 미국

환경오염으로 기영아로 태어나는 아기(비 아기) 수가 증가하고, 임신을 하지 못하는 여성이 늘어남에 따라 극단적인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은 미국 정부를 전복하고 '길리어드'라는 정부를 만든다.

이곳에서는 재혼자, 미혼모, 성수자들의 여성을 군사령관의 '씨받이'로 운용하며 아이를 출산하게 하는 '시녀'로 만든다. 더 이상 출산을 하지 못하는 '시녀' 들은 '아주머니' 등의 다른 기능으로 사용하다가 '식민지'로 보내진다. 주인공은 미국 탈출 중에 남편과 아이와 헤어지고 사령관의 시녀로 살아가면서 예전 기억 속의 '정상'적인 삶과 현재의 '비정상'적인 삶을 비교해가면서 '장벽'에 걸린 시체들을 보며 극도의 공포 속에서 '씨받이'로서 역할을 하지만 임신이 잘 안되자 사령관의 부인에 의해 운전수와 관계를 통해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그러나 곧 검은 벤이 들이닥치고 그것이 '눈'이라 불리는 감시자인지 반란을 모의하는 반군인지 확실치 않은 장면에서 소설은 끝이 난다.

 <핸드메이즈 테일>의 한 장면.

소설을 읽으면서 아래와 같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 조선시대, 현재 여성이 느끼는 한국 사회, 군대 시절, 교회, 기독교


종교 교리로 끊임없이 현재의 말도 안 되는 현상을 극단적인 공포로 강요하는 길리어드 정부 아래서 살아가는 21세기 미국의 모습. 그리고 점점 그  교리에 순응해가는 사람들, 그 가운데 피어나고 있는 반란의 씨앗들, 그 사회를 만든 사령관들 조차 숨 막힌 상황에 실증이 나 만들어진 비밀 파티, 그리고 그곳에 등장하는 비 미국인들(일본)


1985년 작가가 출판을 한 시점의 미국과 2021년 '천박하지만 날것 그대로 보여준' 트럼프 정부

그리고 취업난과 역차별에 대한 피해의식을 가진 한국 20대 남성들의 혐 현상


그리고 떠 오른 훈련소 시절 군대

20여 년을 한 사회에 살아오다가 전혀 다른 세계에 툭 던져진 그때 그 시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상태에서 욕설과 얼차려, 먹고 자고 싸는 시간을 통제받던 그때가 떠 올랐다.

입대 이전 생활과 현실을 비교하가며 사회에서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초코파이가 여기서는 입에서 녹여 먹으며 행복함을 느끼고 있는 '나'를 바라보던 또 다른 '나'를 경험했던 그때가 소설 속 주인공의 독백과 유사한 경험이지 않았을까? 철저히 계급을 나누고 그 계급에 '복종'만을 강요당했던 신병, '국가의 의무'라는 신성함 속에서 '개인의 자유'는 철저히 구속되었던 그 경험이 떠 올랐다. 지금 동시대를 살아가는 지구 상의 어느 곳에서는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남성들에 의해서, 아니면 '종교적 폭력'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힘든 생활과 견주어 보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이리라. 더 확장해 보면 하청 업체에서 '갑질'을 당하면서도 어디 하소연하지 못하는 약자들, '왜 나는 저들과 다른 곳에서 태어나 이렇게 차별을 느껴야 할까'라고 저항감을 느끼는 무수한 사람들까지...


<디피>의 한 장면

때론 그 정당함을 강요하는 것은 '종교', '이데올로기 사상', '애국심', '윤리', '정의'로 이름을 바꾸며 이 사회에 존재하였다. 그리고 최근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돈'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것은 '종교'였다. 소설 속에서도 '기독교' 원리주의를 강요하는 '센터'가 존재하는데 그곳에서 지속적인 폭력과 정당성을 교육하는 여성들이 존재한다. 정말 신념을 가지고 '시녀'를 만드는 '아주머니'와 잡혀온 시녀들은 마치 같은 피 고용인이지만 언어폭력을 가하는 '상사'와 '부하'와 같고, 은행 빚에 허덕거리는 것은 마친가지인 임대인과 임차인과 같다. 정작 누가 그 사회 꼭대기에서 조종하는지는 보지 못하고 하부 계급끼리 갈등과 반목, 학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페미니즘이 여성과 남성의 대립관계가 아닌 것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의 단초를 주는 것은 아닐까?


현재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자랑스러운 신념체계인 '민주주의' 조차도 어느 공간, 어느 시점에서는 '그들'의 목적으로 쓰이면서 '민'이 주인이 아닌 특정 세력이 주인인데 그걸 숨기는 방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과연 인간은 어떻게 '정당함'으로 어떤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일까와 그 가운데 '정치'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이다.  '종교와 미신'을 이용한 '폭력'을 어떻게 무너뜨리고 '개인의 자유'와 '행복 추구'를 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부를 만들 수 있을까이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은 아직까지 '왕'이 되고픈 대통령 후보가 있고,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30~40%가 존재한다. '왕'과 '백성'이라는 중세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민이 주인'이고 그 민의를 대의하는 것이 '대통령'이라는 것을 피를 흘리며 만들어온 세력의 대결이 있다. 시민에서 백성이 될 때, 우리는 '왕'을 만날 것이며, 당연시했던 '자유'는 '불법'이라는 이름으로 불경 시 될 것이다.

'점이나 보러 다니는 여자들' 이란 생각을 가진 이와 '발정제'를 사용했다는 대통령 후보들이 '왕'이 되려고 한다.

<친구>의 한 장면

예전엔 '당연시'되었던 선생님들의 학생들에 의한 체벌이 어느 순간 '폭력'이었다는 인식의 전환, 깨달음... 그것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다. 저항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정권'을 잡아서 '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로 빵을 훔친 이에게 징역을 내린 판사가 '수백억' 횡령을 한 자에게는 휠체어 석방을 해 주는 것이 정의롭지 않다는 것은 '보여주어야 아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을 알게 된 것처럼....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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