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간호사가 되기로 했다

마흔 넘은 그림쟁이의 결심

by 물사자

어느덧 독일에 온 지도 십 년이 넘었다.

나는 운 좋게 좋아하는 그림을 실컷 그릴 수 있는 미대에 진학했으며, 늘 그림과 함께 살아왔다.

그렇게 깔끔하게 몇 문장으로 정리하기에는 우여곡절이 많았으며 지름길이 아닌 늘 돌아 돌아서 가는 듯한 게 내 인생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기억이 아스라이 닿는 어린 시절부터 나는 주욱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40년이 넘게 이것만이 내 길이라고 믿으며 살았다.


최근 몇 년은 그림으로 외주를 받으며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일이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나에게 고정적으로 일을 주던 클라이언트로부터도 일이 끊겼다.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따져 묻지 않았으므로 이유는 알 수 없다.

AI의 영향도 있는 것일까? 추측만 할 뿐이다.


어차피 프리랜서로 산다는 건 불안이 따라다니는 노릇이고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기도 하니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건 일시적인 걸 거야… 곧 다시 일이 들어올 거야.'

희망을 가져보려고 매일매일 애를 썼다. 감사일기를 썼고,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단골 거래처에서 소식이 끊긴 것뿐만 아니라 예전에 협업했던 업체들이나 새로운 곳에서도 소식이 없었다. 날이 갈수록 초조해졌다.


이제는 더는 불규칙한 수입, 불안정한 미래를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그동안 좋아하는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버텼다.

'그래, 해 봤으니까 됐어,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도 실컷 했으니 후회는 없어.' 이런 심정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길을 선택하려고 한다.

앞으로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살고 싶다. 그렇지만 창작으로 수입을 내지 못해도 괜찮다고 정했다.

아무도 봐주지 않아도 괜찮다. 설령 무인도에 떨어지더라도 나는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겠지.


하지만 다른 삶의 모델을 찾아야 한다.

더는 그림에다 대고 '네가 나를 먹여 살려야 해'라는 압박감을 주지 않고 살려면, 창작이 아닌 영역에서 생계를 꾸릴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모두가 다른 길을 걷는다.

전업 작가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걷는 분들도 물론 있다.

직장을 관두고 크리에이터가 되는 길을 택하는 분들도 있다.

나처럼 창작을 하다가 이제는 안정적인 직장을 찾고 싶다고 결심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나는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왜 간호사일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스물아홉 살 때 문득 소설을 쓰고 싶다는 (혹은 내가 해석하기로는 써야만 한다는)

계시 같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나는 마흔두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간호사가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응당 경험해봐야 하는 일이고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다 보니까 엄청나게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인 일이 잘 안 풀릴 때도 있고,

슬슬 힘 빼고 한 일이 잘 될 때도 있고 그렇더라.

지금 내 상태를 말하자면 강한 열정이나 열망 같은 것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저 살며시 이게 내 갈 길이라고 정했다.



브런치삽화01화_ 복사본.jpg

내 인생의 새로운 캔버스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