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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박 Mar 20. 2018

우리는 영화를 산다

당연한 삶 그러나 특별한 영화들

 흥미로운 영화를 감상하고 나면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진다. 함께 영화를 본 친구도 재밌었기를 바란다. 함께 호들갑 떨며 감상을 주고받고 싶다. 어떤 장면이 나의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들고 있다는 그 느낌. ‘좋은’ 영화라 불리는 것들은 빠짐없이 저 느낌을 준다.

 영화는 그럴싸한 주제를 어렵게 포장하는 예술이 아니다. 정말로 간단한 단어들로 말할 수 있다. ‘사랑’, ‘꿈’, ‘희망’ 등이 영화의 주제다. 영화는 우리와 수다 떨고 싶어 한다. 당연하지만 변하지 않는 어떠한 가치들에 대하여 말이다





억압과 희망의 공존 / <쇼생크 탈출> 그리고 <설국열차>

  모순되게도 희망은 억압된 장소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우리는 영화를 볼 때 주인공의 희망에 기대를 걸게 된다. 우리의 감정은 마치 주식투자처럼 주인공을 향하여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주인공의 희망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투자한 감정을 몇 배로 돌려받는다. 그러나 반대로 주인공의 희망이 좌절될 때, 우리가 투자한 감정은 공중분해된다.

  갇혀있는 두 주인공이 있다. <쇼생크 탈출>의 앤디와 <설국열차>의 커티스다. 앤디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다. 앤디는 절망에 길들여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가끔 맥주도 마셔야 하고, 독방에 갇히는 한이 있어도 음악을 들어야 하며, 꾸준히 책을 읽어야만 한다. 절망은 트램펄린처럼 아래로 꺼졌다가 다시 솟아오르는 기복(起伏) 있는 것이 아니다. 희망할 의지를 꾸준히 빼앗아가는 것이다. 오히려 가장 괴로웠던 순간이 절망과 가장 멀었던 순간이다. 쇼생크에 있다 보면 이유 없이 구타와 강간을 당하지만, 그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 앤디의 희망은 곡괭이처럼 작고 약했지만 벽을 뚫었다. 지나치게 희망적이어서 동화처럼 느껴지지만 현실도 그렇다. 희망은 나약하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벽을 뚫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바쁘게 살아가는 것’(앤디가 쇼생크의 동료 레드에게 했던 말. 영어 대사는 “Get busy living or get busy dying”이었다.)이다.                         

  <설국열차>의 커티스도 어떤 의미로는 억울하게 갇힌 신세다. 달리는 기차 위, 꼬리 칸에서 살아가는 것은 커티스가 잘못해서가 아니다. 꼬리 칸 사람들에게 행해지는 억압은, 그들의 분노를 밀도 높게 응집시킨다. 꼬리 칸의 저항마저도 기차의 체계였다는 사실은 우리가 투자한 희망을 갉아먹는 듯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꼬리 칸에서 엔진을 향해 나아가는 직선적 이야기가 아니라, 기차를 탈출하는 다시 말해 공간을 부수는 영화였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희망은 ‘자유’와 밀접하다. 우리에게는 선택할 자유, 행동할 자유가 필요하다. 쇼생크 감옥이나, 설국열차에 갇혀있다면 책임 정도는 기꺼이 감내할 가볍고 달콤한 의무이다. 우리는 희망을 가질 때 현실과 자주 마주한다. 현실에 굴복한다는 건 나약하다는 증거가 아니다. 우리는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내야 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할 자유’는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선과 악의 공존 / <다크 나이트> 그리고 <케빈에 대하여>

  선(善)은 약하다. 악(惡)은 강하다.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은 조커를 죽이지 못했고 <케빈에 대하여>의 케빈은 아빠와 여동생을 죽였다. 하지만 우리는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을 딱 잘라 나눌 수 없다.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게 사람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복잡한 존재라는 거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와 <케빈에 대하여>의 케빈이 더욱 악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들의 행동에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좀비 영화가 주는 공포는 좀비들이 왜 달리고, 왜 사람을 물어뜯는지 알 수 없는 데서 온다. 그저 좀비에게서 도망가야 할 뿐이다. 우리는 원인 모를, 그래서 해결할 수조차 없는 문제에 공포와 절망감을 느낀다.

  에바는 새빨간 토마토 축제를 즐기는 자유분방한 모험가였다. 그러나 아들 케빈을 낳고 나서, 부모가 된 책임감이라고 정의하기에는 묘한, 아들과의 신경전으로 힘든 하루하루를 이러 가는 중이었다. 엄마가 ‘되어버린’ 에바는 케빈에게 “왜?”냐고 묻지 않는다. “왜 엄마에게 공을 굴리지 않니?”, “왜 친구를 사귀지 않니?” 질문은 관심의 척도다. 케빈이 같은 반 친구들을 학살하기 전에 물어야 할 것들이 많다. “왜 네 동생의 눈을 멀게 했니?”같은 질문을 했어야 했다. 끔찍한 사건이 후에는 “왜?”라고 묻기에 너무 늦은 때였다. 이 영화는 인류를 보듬어왔던 모성애의 필연성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자식을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가, 아니면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에게 정이 드는 것인가? 자식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았기에 에바는 엄마로서 완벽한 선(善)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악(惡)이 탄생했다. 선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조커는 우리의 내재된 악을 끄집어낸다. 저 쪽 여객선을 폭파해야만 우리가 살 수 있고, 검사 하비와 사랑하는 여인 레이철 중에 한 명만 살릴 수 있다. 타인의 목숨을 담보로 할 수 있는 선이 어디 있을까? 조커는 가면을 벗고 솔직해지라고 말하는 듯하다. 배트맨의 가면은 물론, 시민들의 가면까지도. 사실은 배트맨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냐고. 고담시의 뒷골목을 그런 사람에게 맡겨도 되겠냐고, 끊임없이 시민들을 자극한다. 조커와 배트맨이 주는 메시지는, 선과 악의 단순한 대립을 보여주기보다 자아를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자신의 두려움, 외면했던 내면적 모순을 직시하게 한다. 그 두려움과 마주했을 때 하비 덴트처럼 무너질 것인지, 이겨낼 것인지는 우리 몫으로 남는다.

  대체로 인간은 착하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을 위해서, 타인을 위해서 혹은 신을 위해서. 악은 선의 작은 틈새에서 태어난다. 좋은 엄마보다 꿈꾸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에바의 틈에서, 개인적 복수심과 도시의 영웅 사이에서 고뇌하던 배트맨의 틈에서 악이 태어났다. 칭찬의 위로보다 악담의 상처가 훨씬 오래 마음에 머물 듯이, 대체로 악은 선보다 강하다.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악의 편에 서지 않으려 한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가치가 된다. 질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 선이 이기길 바라는 것. 우리의 삶도 끝에 가서는 선이 악보다 더 많았던 인생이 되기를 바라는 것.




우리와 영화의 공존

  어느 영화는 볼 때마다 새로운 결심을 하게 하고, 어느 영화는 볼 때마다 사랑을 하고 싶게 한다. 좋은 영화는 그렇게 삶에 남는다. 앞서 말한 영화가 주는 당연하지만 변하지 않는 가치란, 우리 삶의 가치와 같을 것이다. 사랑이나 철학, 꿈과 희망 같은 것들이 우리 삶에서 사라진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그러므로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변하지 않지만 잊으면 없어지는 소중한 가치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 나를 꿈꾸게 했던 영화들을 다시금 꺼내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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