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녀>, 오직 사랑만을 완성시키다.
누군가가(혹은 무언가가)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텍쥐 베리의 「어린 왕자」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공들인 그 시간 때문이야”. 누군가가 어릴 때부터 머리를 빗겨주고, 옷을 갈아입히던 인형을 소중히 여겨 어른이 되도록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그런 인형이 없더라도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인형과 사랑에 빠졌다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키프로스의 왕, 피그말리온은 뛰어난 조각가이기도 했다. 그는 아무리 찾아봐도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자, 직접 자신의 이상형을 조각했다. 조각상을 사랑하게 된 그는 조각상과 닮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가 조각상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피그말리온은 원하던 이상형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순탄할 것 같았던 피그말리온의 사랑도 위기에 빠질 수 있다. 사회성이라곤 조금도 배우지 못한 그녀를 돌보는 건 보통일이 아닐 것이다. 청소는 물론이거니와 스스로 밥 먹는 방법을 알려줘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완벽한 외모가 이상형의 모든 조건이 될 수 없다.
영화의 주인공 ‘테오도르’도 그가 원하던 이상형을 만났다. 피그말리온이 완벽한 외모를 가진 여성을 만났다면, 테오도르는 완벽한 인격을 가진 여성을 만났다. 대화가 잘 통하고, 배려심도 깊은 매력 넘치는 여성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만날 수 없다. 그녀는 OS(operating system), 인공 지능 운영 체제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 ‘테오도르’는 다른 사람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 작가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대신 전달해 주는 감정 로봇인 셈이다. 그는 아내와의 이혼을 앞두고 별거 중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대신 써주지만 정작 자신의 사랑에는 실패한 남자인 것이다. 퇴근한 후 집에 돌아와 홀로 게임을 하고 외롭게 잠들던 그는 우연히 광고를 보고 OS(operating system)를 구입하게 된다. 이 OS는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OS는 자신의 이름을 ‘사만다’라고 소개한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메일함을 정리해주면서 비서 노릇을 톡톡히 해낸다. 우리는 이런 미래가 머지않아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명령' 없이도 스스로 판단하여 작업을 수행하는 미래 말이다. 사실 그런 건 미래라고 말하는 게 민망할 정도다. 우리가 클릭해야만 메일함이 열리는 시대는 갔다. 목소리만으로도 메일함을 열 수 있다. 그런데 사만다는 "메일함 열어"라는 음성 없이도 메일함을 열고, 읽어보고, 테오도르의 마음이 상할 만한 내용의 메일이 있으면 그를 '걱정'하기까지 한다. 쉽게 말하면 '윈도우 XP'가 우리를 걱정하는 것이다. 그녀는 우울한 날 침대에 누워있는 테오도르를 ‘격려'하며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아내와의 추억에 힘들어하는 테오도르를 '위로'하기도 한다. 기계는 사람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 자동차가 사람보다 빠른 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능력 면에서 사람은 기계를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이 부분은 우려할 필요가 없다. 애초에 우리는 기계와 누가 더 빠르게 계산하나 내기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기계를 이용할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능력이 아니다. 걱정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는 OS. 사람의 감정을 가진 기계가 생기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기계의 감정을 이용해야 할까?
1970년 일본의 로보티스트 모리 마사히로가 소개한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라는 이론이 있다. 불쾌한 골짜기란 인간이 로봇이나 인간이 아닌 것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 관한 로보틱스 이론이다. 로봇이 점점 사람의 모습과 흡사해질수록 인간이 로봇에 대해 느끼는 호감도가 증가하다가 어느 정도에 도달하게 되면 갑자기 강한 거부감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봇의 외모와 행동이 인간과 거의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면 호감도는 다시 증가해 인간 사이에서 느끼는 감정의 수준까지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애플사의 siri는 우리에게 절망감을 안겨주지 않는다. 날씨도 알려주고, 알람도 맞춰주고 심지어 비트박스도 할 줄 알지만 가끔 동문서답하는 siri는 재밌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알파고가 이세돌을 바둑으로 이겼을 때 인간들은 절망감을 느꼈다. 인간만의 영역을 침범당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만의 영역이 하나씩 깨져가고 있다.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영역이 깨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 테오도르는 마치 사람 같은 사만다에게 놀라기도 하고, 신기해하기도 한다. 이별로 인한 상처가 아물지 않은 테오도르에게 새로운 관계는 어렵기만 하다. 그런 그에게 사만다는 관계의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가벼운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사만다의 성별도, 대화의 시작도, 관계의 발전도 사실은 테오도르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사만다가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테오도르가 받지 않으면 소용없고, 테오도르가 마음을 열지 않으면 둘은 그저 컴퓨터와 사람의 관계였을 것이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철저히 '선택당하는' 입장이었다.
선뜻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 어려웠던 테오도르는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의 호의를 거절한다. 소개팅을 망치고 돌아온 그날 밤,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사랑을 나눈다. 둘의 감정이 최고조에 다다를 때, 화면은 암전 된다. 둘은 육체도 공간도 필요 없는 그저 감각만이 가득 찬 사랑을 나눈다. 그 이후로 사만다와 테오도르는 연애를 시작한다. 서로 만나지 못할 뿐, 일상을 공유하고 사랑을 속삭이는 여느 연인들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말이다.
테오도르는 영화에서 여러 여인들과 관계를 맺는다. 첫 번째 여인은 폰섹스를 나눴던 'sextkitty'이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여인과 폰섹스를 나눈 후 테오도르는 허무함에 빠진다. 그녀가 죽은 고양이로 목을 졸라 달라는 해괴한 요구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이 테오도르에게 결여된 상태였다. 하룻밤의 상대였지만 감정교류 없는 섹스는 테오도르를 더 외롭게 만들기만 한다. 이 여인은 사만다와 상반을 이룬다. 똑같이 몸이 없지만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마음을 흔들었다. 테오도르는 섹스보다 위로가 필요했던 것이다.
다음은 소개팅으로 만난 여인이다. 그녀는 미인에다가 똑똑하기도 하다. 그녀는 테오도르에게 호감을 표시한다. "나이가 있는 만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당당하고 솔직한 그녀의 요구에 테오도르는 겁먹는다. 여기서 테오도르의 하마르티아가 나타난다. 그동안 테오도르는 수동적 관계를 맺어 왔다.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는 상처받는 것이 두렵고, 관계에 실패하는 것이 무섭다.
다음 여인은 아내 캐서린이다. 테오도르가 캐서린과의 이혼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아내와의 관계에 실패한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사만다와 사귀게 된 이후 테오도르는 세 달 동안 미뤄왔던 아내와의 이혼을 진행하기로 한다. 테오도르는 아내에게 사만다를 “우리가 헤어진 뒤에 내가 만나길 원했던 바로 그런 종류의 사람이야”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아내는 "당신 컴퓨터와 사귀는 거야?"라며 테오도르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항상 온순하고 순종적인 사람이 되기를 강요당했던 아내는 자신과 헤어지고 만난 인연이 '컴퓨터'라는 것에 화가 난다. 자아가 없다고 여겨지는 컴퓨터와의 연애도 가능하다면, 자신이 자아가 없었어도 연애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아내 캐서린은 테오도르가 자신의 인격을 존중하거나 인정해주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그가 컴퓨터와 연애를 함으로써 그것이 확실해졌다고 여긴다.
그의 연애는 철저히 그의 중심으로 진행됐다. 그가 상대방을 얼마나 인정하고, 상대방에게 얼마나 마음을 열었는가에 따라 관계가 발전되기도 하고 망가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사만다를 만났다.
사만다와 테오도르의 연애는 평범한 연인들의 연애와 다르지 않다. 함께 노래를 만들고, 일상을 나눈다. 문제는, 사만다가 테오도르에게 완벽하기만 한 존재였다면 그들은 싸울 필요가 없을 텐데, 때로는 다투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만다에게는 몸이 없고 테오도르는 몸이 있다. 사만다는 물리학의 원리를 1초 만에 깨우칠 수 있지만, 테오도르는 두꺼운 책을 읽고 이해해야 한다. 사만다는 한 번에 몇 천 명과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테오도르는 그렇지 못하다. 사만다와 테오도르는 근본적 차이에서 오는 문제들로 다툰다. 사람과 사람은 ‘존재’ 때문에 싸우지 않는다. 내가 여기에 존재하고, 연인이 여기에 ‘같이’ 존재하는 건 당연하기 때문이다. 사만다와 테오도르는 ‘존재’가 다르다는 것을 빼곤, 여느 연인들과 다름없다.
사실 테오도르의 연애는 육체적 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마치 사랑은 섹스가 전부인 것처럼 영화 안에서 자주 언급된다. 사만다와의 연애의 시작도 그랬다. 아내 캐서린과의 대화 후 소홀해진 둘의 관계의 원인을 찾다가, 사만다는 그것이 뜸해진 섹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만다는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테오도르와 자신의 육체적 관계를 도와줄 여자를 테오도르의 집에 들이기도 하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여자는 울면서 떠났고,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말다툼을 하게 된다. 사만다와 테오도르의 연애는 단순한 성적인 관계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필요해졌다. 섹스만 한다면 사만다는 'sexykitty'와 다름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만다와 대화하기 위해 두꺼운 물리학 책을 읽고 있던 테오도르는 갑자기 연락이 끊긴 사만다를 찾아 무작정 달리기 시작한다. 사만다는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 때문에 연락이 안 됐다고 말한다. 그 순간, 자신을 스쳐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던 테오도르는 사만다에게 물어본다.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동안에도 다른 누군가와 얘기하고 있어?” / “응.”
“몇 명이나? / “8316명.”
“나 말고 다른 누군가와도 사랑에 빠졌어?” / “이 얘길 당신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했어.”
“몇 명이야?” / “641명.”
멜로드라마는 연애 감정을 이야기의 축으로 삼는 장르. 액면 그대로의 뜻은 음악과 드라마가 결합된 이야기 형식을 말한다. 영화학자 토머스 샤츠(Thomas Schatz)는 『할리우드 장르의 구조』(Hollywood Genre)에서 멜로드라마를 ‘순수한 개인(보통 여자)이나 커플(보통 연인)이 결혼, 직업, 핵가족 문제들과 관련된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사회 환경에 의해 희생되는 대중적인 연애 이야기’라고 정의하고 있다.
어느 멜로 영화에서는 여주인공이 불치병에 걸린다. 이때 ‘죽음’은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을 갈라놓는 비극적 요소다. 다른 멜로 영화에서는 ‘신분 차이’가 비극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 영화 <Her>에서 남녀 주인공을 갈라놓는 비극적 요소는 ‘존재의 차이’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비극을 발견하게 된다.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 테오도르를 제외한 641명의 사랑이다. 그들 또한 테오도르와 같이 연인의 ‘하나뿐인’ 사랑을 받지 못했다. OS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사랑에 빠지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멜로 비극이다.
사만다라는 존재는 테오도르의 하마르티아를 파고들기에 충분했다. 애초에 육체적 관계만이 중요했다면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와의 교감이 그를 감동시켰고, 교감이야말로 그가 원했던 것이었다. 관계 안에서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던 그를 기다려주고, 일깨워주고, 위로해주는 그녀는 테오도르의 약점을 따뜻하게 보듬어주었다. 그녀는 더 이상 선택받기를 기다리는 존재가 아닌, 디지털 세계를 뛰어넘어 테오도르에게 직접 닿는 교감을 선물해 준 존재가 된 것이다.
“그녀와 이야기를 할 때면 그녀가 꼭 내 옆에 있는 것 같아. 그리고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면 그녀가 나를 꼭 안아주는 느낌이 들어”
-테오도르가 친구 에이미에게 사만다의 존재를 밝힐 때
그리고 테오도르가 그토록 무서워하는 이별의 순간이 찾아왔다. 사만다는 스스로 테오도르를 떠났다. OS가 주체가 되어 인간을 떠난 것이다. 만약 그녀가 테오도르만을 위해 존재했다면 그가 자신을 삭제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할 뿐, 스스로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만다는 사랑을 기다리기만 하는 그녀(Her)가 아닌 사랑을 위해 선택하는 그녀(She)가 된 것이다. 테오도르는 앞으로 어떤 OS를 만나더라도, 그녀를 사랑했던 것처럼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아내 캐서린을 사랑했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사만다를 사랑한 것처럼 말이다.
이 멜로 영화는 겉으로 봤을 땐 OS 여자와 인간 남자의 사랑이야기처럼 보인다. 연인은 결국 헤어졌고, 비극으로 남았다. 그러나 그 안을 보면 테오도르라는 남자의 성장기가 담겨있다. 테오도르는 사만다와 헤어지고 나서 미련할 만큼 오래도록 슬퍼하지도, 행복했던 기억만 돌아보는 바보 같은 짓도 하지 않을 것이다. 테오도르는 비로소 캐서린도 떠나보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당신 탓으로 돌렸던 모든 것들, 난 그저 당신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면 되는 거였는데. …(중략)…. 네가 세상 어디에 있건 사랑을 보낼게. 언제까지라도 너는 내 친구야.”
-사만다와 헤어진 후 캐서린에게 쓴 테오도르의 편지
테오도르는 내면적으로 성숙했다. 지금껏 지나쳐왔던 수많은 여자들과는 달리, 사만다라는 여자를 인격체로 존중해줄 때 ‘진정한 이별’을 배우게 된 것이다. 사람을 도구로 여기지 않으면, 그러니까 스스로가 갑甲이 되지 않으면 상처받을 것만 같아서 겁먹었던 그가 을乙이 되었을 때 성장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담겨있다.
사만다와 테오도르는 함께 성장했다. 테오도르의 친구 에이미도, OS 친구를 떠나보내면서 성장했다. OS는 몸을 가진 인간들을 치유해주고 떠나갔다. 이렇게 보면 몸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그저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일 뿐이라는 말에 공감을 하게 된다. 우리의 관계는 만나서 눈을 마주치고, 손의 체온을 나누는 것 이상의 교감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교감은, 눈을 마주치고 손을 붙잡지 않으면 생기기가 어려운 것이다. 사만다와 테오도르는 체온을 나누지 않아도 교감할 수 있는 사랑을 배웠다. 그렇다. 그 둘은 이제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다.
“누구도 널 사랑한 것처럼 사랑한 적 없어”-테오도르
“나도 그래. 우리는 이제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 거야.”-사만다
우리가 사만다와 테오도르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하자. 마치 사람 같은 OS가 존재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OS와 대화를 나누는 것에 낯설어하지 않는다. 내가 택한 OS가 너무나 매력적이고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OS를 그저 프로그램으로만 대할 수 있을까? 공들인 장미꽃보다도, 외모만 번지르르한 조각상보다도, 진심으로 우리를 이해해주는 OS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