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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박 Mar 26. 2018

우리 아빠는 500살이야

영화 <거짓말>, 세상에는 짜증 나게도 좋은 게 너무 많다.


거짓말의 계보

 '지기 싫어서 하는' 거짓말은 보통 어릴 때 열심히 한다. "우리 아빠는 500살이야", "우리 할머니는 700살이야." 지금 생각해보니 어른들의 나이를 정확하게 가늠하지 못했던 시절의 순수였던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은 그렇게 오래 못 사는 걸 알면서도 거짓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영악한 거짓말의 절정은 학창 시절이다. 친구와 친구사이, 학원과 부모 사이, 학교와 집 사이에 오고 가는 나의 짧은 거짓말들. 알고도 넘어가 줬던 어른이 있을 거고, 10대 소녀가 하기에는 통 큰 거짓말이라 깜빡 속아 넘어간 어른이 있을 수도 있다. 각자의 학창 시절을 생각하면 중, 고등학생들이 그다지 순진하지 않다는 걸 금방 깨닫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상황 모면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 이때의 거짓말은 '자연스러움'이 생명이다. 상사가 설명해주는 업무를 이해한 척한다거나, 부모님이 싸주신 반찬을 먹은 척한다던가(맛의 디테일을 묘사하는 게 중요하다).

 인간의 거짓말은 꽤나 전통이 깊다. 성경에 나오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나서 했던 거짓말부터 2018년을 살고 있는 우리가 하는 거짓말까지... 이쯤 되면 인간의 본능이 아닌가 싶다.




영화 <거짓말> 포스터



 <거짓말>의 아영은 상황 모면을 위해서가 아닌, 지기 싫어서 거짓말을 한다. 아무도 아영을 이기려 하지 않는데, 아영은 바득바득 지고 싶지가 않다. 우리 안에 있는 어릴 때의 나쁜 습관들은 ‘무언가가 부족해서’ 생겼지만 결핍이 해소돼도 습관은 잘 고쳐지지 않는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도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것처럼, 저절로 그렇게 되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자연스러운 것들. 어느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을 유치원에서 이미 다 배웠다. 우리는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알면서도 그랬다. 아영도 그랬다. 잘못된 걸 알면서도 거짓말을 한다.



가지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SNS에 꾸며진, 좋은, 화려한 모습만 올리는 현대인은 식상한 사회 현상이다. 아영의 삶은, SNS의 사진이 아니라 아영의 거짓말로 화려하게 치장된다. 세상에는 진짜 짜증나게도 좋은 게 너무 많아서, 모른 척하기가 어렵다.

 좋은 냉장고도 많고,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도 많고, 좋은 폰도 많고, 심지어 세상에는 돈도 너무 많다. 그러나 내 것은 없다. 어차피 인간은 반대편을 향해 달리게 되어있다. 돈이 많으면 정情을 향해, 정情이 많으면 돈을 향해. 그러나 아영에게는 정情도, 돈도 없다. 그러다 보니 돈의 온기에 매달리게 된다. “살게요”할 때 직원이 쳐다보는 눈빛. 아영에게는 냉장고보다도 그 짧은 순간이 가장 달콤하다.

영화 <거짓말>. 가전제품 매장에서 비싼 제품을 사는 척 하는 아영.


 그러나 야속하게도 모든 물건에는 제자리가 있는 법. 가스레인지 위에 냉장고를 올려놓지 않는 것처럼, 250만 원짜리 냉장고가 아영의 집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아영은 영원히 부잣집 사모님이 될 수 없다. 그녀는 욕심이라는 좋은 휘발유를 가지고 있지만, 기름을 넣을 차가 없다. 소프트웨어를 담지 못하는 하드웨어는 고장 난다. 아영은 그렇게 서서히, 고장 나기 시작한다.



철장 속 다람쥐의 행복

 나는 로또에 당첨되고 싶다. 그래서 매주 로또를 산다. 돈이 많으면 평일 낮에 좋은 카페에 갈 수 있을 거고, 비싼 뮤지컬도 맘껏 볼 수 있을 거다. 그러면 글도 더 잘 쓸 수 있을 것 같고, 여유가 생기니 표정도 필 것 같고, 일대일 필라테스는 물론 비싼 트레이너를 고용하여 헬스장에 가서 근육도 키울 수 있을 것 같다.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

 우리는 아영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며 우리의 도덕적 우위에 대해 만족한다. '나는 저 정도는 아니다'하는 생각들. 그런데, 동시에 아영이 너무 불쌍하기도 하다. 알코올 중독과 당뇨병에 걸린 언니,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나아질 것 없는 형편, 가난한 남자 친구의 청혼. 

 문득 무서워진다. 나도 아영처럼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면서 괜찮은 척, 열심히 사는 척, 이게 정답인 척하면서 계속 살아가도 괜찮을까? 그렇다고 아영이처럼 거짓말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 이렇게 얕은 행복에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나? 거창한 행복 없다지만, 세상에 17억만큼 행복한 것이 또 있을까?



아영아,

 거짓말을 들켜 차라리 사라지고 싶어하는 아영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안심해서 미안하다. 나 대신 실컷 거짓말해줘서 고맙다. 죽기가 무서워서 그렇지, 우리 모두 가끔은 사라지고 싶다. 우리도 가슴속에 거짓말하며 산다.


"나 지금 이렇게 사는 거 어쩔 수 없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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