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공녀>, 당신 원래 엑셀 파일 작업을 좋아했나요?
회사를 다니다 보면 엑셀 프로그램을 자주 쓰게 된다. 문득 감상에 빠져 주위를 둘러보면 다들 엑셀이나 파워포인트, 한글 등을 붙잡고 열심히 일하는 중이다. 참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난 이 질문을 하루도 빼먹은 적이 없다.
엑셀 프로그램이 꿈이었던 사람이 있을까?
일 잘하기로 유명한 팀장님은 신학과를 졸업했다. 얼떨결에 취직이 되어 여기까지 왔지만, 자기는 신학을 공부하는 게 꿈이었다 했다. 덜렁대서 항상 혼나는 대리님은 음악학과를 나왔다. 색소폰을 전공했고, 아직도 정기적으로 합주를 하지만, 아무튼 지금은 엑셀 파일을 열심히 만지고 있다. 사람이 잘 하고 좋아하는 거 하면서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래서 묻고 싶다. 당신 원래 엑셀 파일 작업을 좋아했나요?
미소는 좋은 게 많다. 담배, 위스키, 남자 친구, 음악. 그러니까 팀장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대리님이 색소폰을 좋아하는 것처럼. 미소의 하루 일당은 4만 5천 원. 가사도우미 일을 하며 하루하루 꽤나 착실하게 살아왔다. 새해가 되자 담배 값도, 위스키 값도 올랐다. 설상가상 월세도 5만 원이나 올려달란다. 그러면 하루는 그냥 꽁으로 일해야 하는 건데? 담배랑 위스키를 너무너무 사랑하니까 어쩔 수 없다! 우선순위가 확실한 미소는 가장 덜 좋아하는 집을 버리기로 한다.
미소는 예전에 함께 밴드 하던 친구들을 차례대로 찾아가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한다. 집이 없다는 미소의 말에, 누구는 한심하게 생각하는 듯하고, 누구는 스스로의 살길이 바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집에도 기운이 있다. 그리고 그 기운은 집에 사는 사람이 만든다. 그 사람들의 집, 그 사람의 마음 상태와 크게 밀접해 보인다.
미소는 밴드에서 키보드 치던 현정이네 집에 갔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남편은 무슨 시험 준비를 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사이가 별로 같다. 괜스레 미안하다. 키보드를 참 잘 치는 친구였는데. 땅에서는 무언가가 솟아오르고, 하늘에서는 무거운 것이 내려와서 현정이를 꾹-하고 누르는 중인 것 같다. 슬픔과 한恨의 정서가 현정이를 꽉 채웠다. 대학시절의 현정이는 자유분방하고 멋졌는데. 현정이는 밥 차리는 게 좋고, 시부모님을 모시며 사는 게 행복할까?
기타 치던 정미 언니는 사모님이 됐다. 엄청 넓은 집에서, 떡두꺼비 같은 아들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 같다. 방이 너무 많아서 눈치도 덜 보이고, 아무튼 미소의 상황이 조금은 나아졌다. 정미 언니 남편에게 "언니는 뜨거운 사람이었어요"라고 말하고, 맞담배를 폈다. 그런데 정미 언니가 미소에게 "한심하다"며 돈 백만 원을 쥐어준다. 보증금 모으는 돈에 보태 어서 집을 나가 달라 한다. 미소의 촛불 같은 소소한 일상은 정미 언니에게는 하나도 뜨겁지 않다. 친구들의 변한 모습이 씁쓸하다. 미소는 세월에도, 돈에도, 추위에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소는 집 정리하는 일을 한다. 쓰레기도 버리고, 먼지도 털고, 설거지도 해 놓고. 집이 사람의 마음을 나타낸다면, 미소는 사람들의 마음을 청소해주는 일을 하는 거다. 밴드 식구들이 모여 자신들이 만났던 미소를 떠올릴 때, 왠지 모를 웃음이 지어지는 이유. 자신들이 세월의 풍파에 꺼트려버린 '행복의 불씨', 미소의 촛불에는 여전히 그 불씨가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알겠지만 담배랑 위스키 좋다고 집 버리는 미소 같은 사람 별로 없다. 그러니까 좀 막막하지만 우리가 스스로의 집과 마음을 청소해야 한다. 영화 <소공녀>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이거다.
그래도 우리, 집이랑 마음 치우면서 살아요.
+)
영화를 보고 나서 문득 떠오른 만화의 주제가다. 미소를 위해 바친다.
날쌔게 달려가요 햄토리 어디든지 달려가요 햄토리
제일 좋아하는 건 까만 해바라기씨
방가 방가 우리 친구 햄토리
빙글빙글 돌아봐요 햄토리 쳇바퀴를 돌려봐요 햄토리
제일 좋아하는 건 까만 해바라기씨
방가 방가 우리 친구 햄토리
파란 밤엔 푸~욱 자요 햄토리 어디서든 푸~욱 자요 햄토리
제일 좋아하는 건 까만 해바라기씨
방가 방가 우리 친구 햄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