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변산>, 청춘의 빚
나는 평생을 한 동네에서 살았다. 한 학기의 교환 학생과 1년 남짓한 기숙사 생활을 제외하면 그렇다. 동네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특정한 장소에 묻어있는 추억들이겠지만, 아무튼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어른이 된 나까지도 넉넉하게 품어주는 고향이자 동네를 생각하면 괜스레 뭉클해진다.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인가.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는 신체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슬픈 말이지만 마음도 늙는다. 예전 같으면 <변산>을 보고 콧방귀를 뀌었을 텐데, 이제는 끄덕거리게 된다. 아주 우려하던 일이었다. 마음이 늙어서, 어른을 이해하게 되는 일 말이다.
브런치에 <변산>을 검색해보니 '브런치 뮤비 패스'로 변산을 관람한 작가분들이 많이 보인다. 나는 브런치의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시리우스 리'님과 제 돈 주고 관람했다.
왜 나는 다른 사람보다 글도 못 쓰고 그래서 뮤비 패스에도 초대 못 받고. 시인이 되고 싶은데! 하루 종일 시 쓰고 싶은데 왜 평일 9시까지 출근을 해야 하나! 아프니까 청춘이라니! 왜 우리 부모님은 강남에 땅을 안 사놓으셔서, 나는 재벌 2세가 되지 못했을까! 나도 금수저처럼 언제나 새로 배우고 싶고, 새로 시작하고 싶다!!...
우리 청춘들은 요즘 화가 나 있다. 장강명의 소설 <표백>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금의 청년 세대는 '표백 세대'다. 이 세상은 이미 너무도 완벽한 하얀 세계라서, 젊은이들이 끼어들 곳이 없다는 것이다. 위대한 이데올로기는 이미 예전에 다 나왔기 때문에 혁명 같은 것은 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오래전부터 견고하게 자리 잡아 우리 세대를 부품으로 태어나 노예로 죽게 만든다. 기성세대들이 이미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청년세대는 죽도록 노력해도 기성세대만큼의 부를 축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실패들을 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돌리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청년들은 무기력해진다. 전쟁도, 억압도 없이 그저 개인의 "작은" 성공을 위해 평생을 다람쥐처럼 쳇바퀴 돌다가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변산>을 보면 화가 날 수 있다. 바람 나서 집 나갔던 건달 아빠가 자기 아프다고 병원으로 부르지를 않나, 서울에서 꿈 키우며 열심히 살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불려 내려와서 수갑도 차고, 양아치 소리도 듣고, 깡패 된 초등학교 동창한테 굴욕을 당하기도 하고. 해준 건 뭣도 없는 고향이 발목을 엄청나게 붙잡는다. 이 영화는 술 먹은 아빠 같다. 했던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새벽에 앉아 들을 수밖에 없었던 아빠의 푸념들.
대부분의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받은 게 별로 없다. 물려받은 것도 없고, 돌려줄 것도 없다. 그래, 나는 세상에 빚 진 거 없이 혼자서 잘 살아왔다.
학수의 아버지는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다. 건달이었고, 죄를 지어서 감옥에도 다녀왔다. 어머니 장례식장에도 안 오는 사람이었다. 학수는 전역한 후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는 시를 썼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랩 가사를 썼다. 그렇게 십 년 가까이, 고향 변산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말에 꾸역꾸역 내려갔다. 고향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학수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게 된다. 그리고 학수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울었다. 평생을 미워했는데 아버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사람이 죽을 때 눈물이 난다.
가끔 생각한다. 내가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부모님을 좀 더 다르게 대했을까?
학수의 고향은 가난해서 학수에게 준 것이 없어 보인다. 십 년 가까이 어머니의 무덤을 벌초해준 고향 친구들, 자신을 계속 기억해준 선미, 고향의 노을을 보고 썼던 시로 받았던 대상... 인생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문득 감사해질 때가 있다. 평생 미워해 온 아버지를 제쳐두면, 학수는 갚을 것이 꽤 많아 보인다.
어쩔 수 없이 지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버지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거나,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고향의 노을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순간이 그때일 것이다.
영화 자체는 뻔하다. 고향의 향수와 한 사람의 성장을 그린 영화라면 차라리 <레이디 버드>가 좋다. 우리나라 청춘은 <변산>에 없다. 부모를 용서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하는 청춘에 대한 예찬은 무책임해 보인다. 그치만 이 영화에는 박정민의 연기가 있고, <레이디 버드>는 담지 못할 (부정적 혹은 긍정적인) 한국이 있다.
내가 시를 쓰고 싶어 하는 것이 나 스스로가 만들어낸 꿈인가를 생각해봤다. 나에게도 가난한 고향 동네가 있다. 나에게 슬픔을 안겨준 지난날의 가족이 있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미워하는 것이라도, 그것이 사라진다면 나는 울 것이다. 그래서 <변산>을 재밌게 봤다. 언젠가는 떠날 나의 동네와 가끔은 미운 존재들을 떠올리며, 마음의 여유가 허락할 때까지 그것들을 용서하고, 감사하며 살기로 했다.
내 안에 있는 그 노랠 찾아서
내가 살고 싶은 그 집을 찾아서
내가 사랑할 그 사람을 찾아서
내가 되고 싶은 가족을 찾아서
나는 언젠가 후회하게 될까
오늘 엄마의 전활 받지 않은 것
내 평생 아빨 용서하지 않은 것
키우는 고양일 세게 때렸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