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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박 Jul 12. 2018

빚 진 적 없는 그대에게

영화 <변산>, 청춘의 빚


 나는 평생을 한 동네에서 살았다. 한 학기의 교환 학생과 1년 남짓한 기숙사 생활을 제외하면 그렇다. 동네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특정한 장소에 묻어있는 추억들이겠지만, 아무튼 어린 시절은 물론이고 어른이 된 나까지도 넉넉하게 품어주는 고향이자 동네를 생각하면 괜스레 뭉클해진다.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인가.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는 신체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슬픈 말이지만 마음도 늙는다. 예전 같으면 <변산>을 보고 콧방귀를 뀌었을 텐데, 이제는 끄덕거리게 된다. 아주 우려하던 일이었다. 마음이 늙어서, 어른을 이해하게 되는 일 말이다.








세상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나

 브런치에 <변산>을 검색해보니 '브런치 뮤비 패스'로 변산을 관람한 작가분들이 많이 보인다. 나는 브런치의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시리우스 리'님과 제 돈 주고 관람했다. 

 왜 나는 다른 사람보다 글도 못 쓰고 그래서 뮤비 패스에도 초대 못 받고. 시인이 되고 싶은데! 하루 종일 시 쓰고 싶은데 왜 평일 9시까지 출근을 해야 하나! 아프니까 청춘이라니! 왜 우리 부모님은 강남에 땅을 안 사놓으셔서, 나는 재벌 2세가 되지 못했을까! 나도 금수저처럼 언제나 새로 배우고 싶고, 새로 시작하고 싶다!!...


 우리 청춘들은 요즘 화가 나 있다. 장강명의 소설 <표백>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금의 청년 세대는 '표백 세대'다. 이 세상은 이미 너무도 완벽한 하얀 세계라서, 젊은이들이 끼어들 곳이 없다는 것이다. 위대한 이데올로기는 이미 예전에 다 나왔기 때문에 혁명 같은 것은 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오래전부터 견고하게 자리 잡아 우리 세대를 부품으로 태어나 노예로 죽게 만든다. 기성세대들이 이미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청년세대는 죽도록 노력해도 기성세대만큼의 부를 축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실패들을 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돌리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청년들은 무기력해진다. 전쟁도, 억압도 없이 그저 개인의 "작은" 성공을 위해 평생을 다람쥐처럼 쳇바퀴 돌다가 죽어야 하는 것이다.


편의점 알바를 하며, 랩퍼의 꿈을 키우는 학수.


 그래서 <변산>을 보면 화가 날 수 있다. 바람 나서 집 나갔던 건달 아빠가 자기 아프다고 병원으로 부르지를 않나, 서울에서 꿈 키우며 열심히 살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불려 내려와서 수갑도 차고, 양아치 소리도 듣고, 깡패 된 초등학교 동창한테 굴욕을 당하기도 하고. 해준 건 뭣도 없는 고향이 발목을 엄청나게 붙잡는다. 이 영화는 술 먹은 아빠 같다. 했던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새벽에 앉아 들을 수밖에 없었던 아빠의 푸념들.


 대부분의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받은 게 별로 없다. 물려받은 것도 없고, 돌려줄 것도 없다. 그래, 나는 세상에 빚 진 거 없이 혼자서 잘 살아왔다.







가난한 고향이 준 것

 학수의 아버지는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다. 건달이었고, 죄를 지어서 감옥에도 다녀왔다. 어머니 장례식장에도 안 오는 사람이었다. 학수는 전역한 후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는 시를 썼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랩 가사를 썼다. 그렇게 십 년 가까이, 고향 변산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말에 꾸역꾸역 내려갔다. 고향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학수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게 된다. 그리고 학수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울었다. 평생을 미워했는데 아버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사람이 죽을 때 눈물이 난다.

 가끔 생각한다. 내가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부모님을 좀 더 다르게 대했을까?


 학수의 고향은 가난해서 학수에게 준 것이 없어 보인다. 십 년 가까이 어머니의 무덤을 벌초해준 고향 친구들, 자신을 계속 기억해준 선미, 고향의 노을을 보고 썼던 시로 받았던 대상... 인생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문득 감사해질 때가 있다. 평생 미워해 온 아버지를 제쳐두면, 학수는 갚을 것이 꽤 많아 보인다.

 어쩔 수 없이 지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버지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거나,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고향의 노을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순간이 그때일 것이다.


용대와 화해 아닌 화해.. 남자들은 왜 이렇게 화해하는거지?


 영화 자체는 뻔하다. 고향의 향수와 한 사람의 성장을 그린 영화라면 차라리 <레이디 버드>가 좋다. 우리나라 청춘은 <변산>에 없다. 부모를 용서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하는 청춘에 대한 예찬은 무책임해 보인다. 그치만 이 영화에는 박정민의 연기가 있고, <레이디 버드>는 담지 못할 (부정적 혹은 긍정적인) 한국이 있다.


 내가 시를 쓰고 싶어 하는 것이 나 스스로가 만들어낸 꿈인가를 생각해봤다. 나에게도 가난한 고향 동네가 있다. 나에게 슬픔을 안겨준 지난날의 가족이 있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미워하는 것이라도, 그것이 사라진다면 나는 울 것이다. 그래서 <변산>을 재밌게 봤다. 언젠가는 떠날 나의 동네와 가끔은 미운 존재들을 떠올리며, 마음의 여유가 허락할 때까지 그것들을 용서하고, 감사하며 살기로 했다.










이랑의 '가족을 찾아서'

내 안에 있는 그 노랠 찾아서
내가 살고 싶은 그 집을 찾아서
내가 사랑할 그 사람을 찾아서
내가 되고 싶은 가족을 찾아서

나는 언젠가 후회하게 될까
오늘 엄마의 전활 받지 않은 것
내 평생 아빨 용서하지 않은 것
키우는 고양일 세게 때렸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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